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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량 춘당집 목판 및 변계량 춘정집 목판 (卞仲良 春堂集 木板 및 卞季良 春亭集 木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5. 3. 6. 10:44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명칭
변중량 춘당집 목판 및 변계량 춘정집 목판 (卞仲良 春堂集 木板 및 卞季良 春亭集 木板)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
177매
지정일
1979.12.29
소재지
경남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변용희
설명
조선초기 문신 춘당 변중량의 문집과 그의 아우 춘정 변계량의 실기책판으로 500년전에 배나무로 판각한 것임.
(1) 춘당집 책판
춘당집 책판은 변중량의 시문집을 목판으로 2권 1책으로 순조 23년(1823)에 간행되었고 서문은 조인영이 썼음. 변중량은 변계량의 형으로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사위로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제거 당했음. 시에 능했으며 지금은 없어진 가조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음
(2)춘정집 책판
문집은 춘정 변계량의 문하인 판승문원사 정척이 수집 편차한 것을 세종의 명에 따라 집현전에서 교정하여 원고를 만들었음. 목판은 그 문인인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권맹손이 세종 24년(1442)에 밀양에서 처음 간행함. 춘정집은 원집이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4권까지에는 사 ·시이고 5권에는 기 ·서 · 잡저 · 설, 6권에는 봉사 · 상서, 8권에는 대책 ·교서 9권에는 표전, 10권에는 청사, 11권에는 책문, 제문, 축문, 12권에는 비지 · 명발 등이 실려있음. 변계량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문과급제 후 여러 벼슬에 이어 대제학을 20여년간이나 지냈음. 문장과 시에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음.춘당은 변중량(
[정의]
?∼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춘당(春堂). 신의위보승산원(神義衛保勝散員) 변주(卞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찬성사(贈贊成事) 변원(卞原 또는 卞元)이고,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변옥란(卞玉蘭 또는 卞玉鸞)이며, 어머니는 전객서부령(典客署副令) 성공필(成公弼)의 딸이다.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형이며,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백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를 지냈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이 이제(李齊) 등과 함께 스승인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미리 눈치채고 이성계에게 문병가는 것을 말렸으나 정몽주는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이성계의 집에 다녀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고려(高呂) 등에게 살해되었다.1395년(태조 4) 전중경(殿中卿)으로 있으면서 병조정랑 이회(李薈) 등과 함께, 정권과 병권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에게 다 맡겨진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가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고 전중경의 관직을 박탈당하였다.1395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될 때에 전중경이었다. 1398년 우부승지·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이르렀다. 이해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참살되었다. 시에 능하였고, 경상남도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춘정은 춘당의 아우 변계량(卞季良)
[정의]
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주(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사 원(元)이고,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鸞)이다.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인이다.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對句)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85년 문과에 급제, 전교주부(典校注簿)·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郎將)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郎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태종 초에는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이 때 가뭄이 심해 상왕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렸다.그 뒤 태종 말까지 수문전제학·좌부빈객·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우빈객·예조판서·경연지사·춘추관지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419년에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 이종무(李從茂)를 앞세운 기해동정(己亥東征)을 성공케 하는 데 공헌하였다.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과거 시관으로 지극히 공정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려 말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화산별곡 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 ≪춘정집 春亭集≫ 3권 5책이 전한다.≪태조실록≫·≪국조보감 國朝寶鑑≫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했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찬하였다.그 외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만한 것을 모아 쓴 ≪정부상규설 政府相規說≫이 있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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