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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은 상현서원 (報恩 象賢書院)-충청북도 기념물 제43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2. 10. 27. 13:26

    보은 상현서원 (報恩 象賢書院)-충청북도  기념물 제43호

     

     

     

    종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43호

    명칭

    보은 상현서원 (報恩 象賢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1 곽

    지정일

    1984.12.31

    소재지

    충북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304

    시대

     

    소유.관리

    향교재단,어기선

    설명

    충암 김정(1486∼15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김정은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로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림과 시문에도 능하였고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서원은 명종 10년(1555)에 ‘삼년성서원’으로 세웠고 광해군 2년(1610)에 국가 공인의 사액서원으로서 ‘상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헌종 13년(1672)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성운·성제원·조헌·송시열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된 뒤 1896년 ‘장례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웠으며 1986년 해체·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당은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될 때 ‘보은향교’로 옮겨 향교의 교육 장소인 명륜당으로 사용하여 왔다.

    나지막한 산을 뒤로하고 세운 이 서원은 작은 규모의 사당과 비석이 안치된 비각, 출입문으로 구성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의 비각이 있고 뒤편으로 별도의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김정의 위패를 중심으로 좌우에 성운·성제원·조헌·송시열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웠는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낸다.

     

     

     

     

     

     

     

     

     

     

     

     

     

     

     

     

     

     

     

     

     

     

     

     

     

     

     

     

     

     

     

     

     

     

     

     

     

     

     

     

     

     

     

     

    충암 김정

    김 정(金淨) : 충암 김정(1486-1521)은 조선 전기의 충신이다. 22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정원 도승지, 대사헌, 성균관 제학, 형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조광조의 일파로서 학문과 정치의 합일을 모색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중종 15년(1520) 제주 동문 밖 금강사지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곳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사(賜死)될 때까지 1년 2개월 동안 위리안치(죄인을 배소(配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둠)되었는데 짧은 유배 기간이었지만 교학 활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장사와 제사의 예법을 가르쳐 주었고 음사를 숭배하는 악풍을 교도하여 성리학적 질서 보급에 힘썼으며 한라산 기우제문, 수정사 중수기 등 많은 제사문과 시작(詩作) 등을 남겼다. 특히 그가 저술한 {제주풍토록}은 조선 전기 제주도의 사회 사정을 연구하고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유해는 이듬해 겨울 충주 주안현 탑산사로 옯겨졌고 24년 후인 인종 원년에 죄명이 삭제되고 관작이 복구되는 한편 문간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제주에서는 그가 절명한지 57년 만인 선조 11년(1578) 조인후 판관에 의하여 충암묘가 세워지고 귤림서원을 세워 그를 우러러 왔다. 오늘날 오현단 경내에는 충암을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원래는 가락천 동쪽의 적소에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비신이 파손되어 하반부가 없어진 채로 남아 있다.

    冲菴 金淨의 時代背景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를 주도해온 정치세력의 변화추이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면 16세기를 前後하여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체로 16세기 이전이 훈구사공파의 관료정치시기였다면, 이후는 사림정치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의 분기점인 16세기의 조선왕조 사회는 정통성리학파인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훈구사공계열의 관료들과 정치적 대립 속에서 몇 번의 사화를 치루는 가운데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고 따라서 역사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이다. 역사의 주역으로 사림파의 등장을 촉진시킬 수 있었던 사상적인 밑바탕은 성리학이였다. 성리학은 원시유교가 추구했던 실천도덕 즉 인성의 수행을 재확인하고 그의 당위성을 다시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종래 도 &․ 불에 비해 열세에 놓였던 철학이론면을 강화함으로써 외적으로 도 &․ 불의 허망성을 배척하고 유교의 실용성을 천명하고 또 내적으로 지성적 자각을 통한 덕성의 수행면을 확대시킨데 특성이 있다. 중국 송남의 주희에 이르러 집대성된 성리학은 중소지주층의 학문으로 말해진다. 즉 이 시기에 역사의 새로운 담당자로 부상한 중소지주 출신의 학자 &․ 관료들이 당대까지의 대귀족 &․ 대지주중심의 사회 체제를 비판 지양하는 논거로서 유학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체제를 새로이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다.
    세종조의 盛代를 거쳐 세조의 왕위 찬탈과 이에 참여한 공신들에의해 정치적인 시련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에 의해 정치적 기반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세조대를 이은 성종도 세종시대의 집현전 제도를 부활하여 홍문관으로 고치고 학문 연구에 주력하는 하였다. 자신이 몸소 유교정치를 힘썼기 때문에 文運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수반하여 자연히 지방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던 신진 사림의 학자들이 관료로서 상당히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이 주로 영남출신의 신진 학자들로 재야에서 정통성리학을 이어온 학문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사림들이다.

    오현단 : 지방기념물 제1호.

    지방기념물 제1호 오현단

    오현단의 유래를 살펴보면 1578년 (선조 11)조이후 판관은 충암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충암묘를 짓고 제사지내게 한데서 시초를 찾아 볼수 있다.
    지방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오현단은 1871년(고종 8)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665년(헌종 6) 최진남 판관이 세운 귤림서원이 철폐된 후, 1892년(고종 29) 김의정 제주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단의 유래를 살펴보면 1578년 (선조 11)조이후 판관은 충암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충암묘를 짓고 제사지내게 한데서 시초를
    찾아 볼수 있다.
    지금의 오현단 자리인 귤림서원에 모셔졌던 오현은 충암 김정 이외에 안무사 청음 삼사헌 동계 정온, 제주 목사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등으로,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부임했던 이들은 지방문화 발전에 적지않게 공헌하였다.
    오현단내에는 이들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 - 45 cm, 너비 21 - 23cm, 두께 14 - 16cm의 조두석과 함께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의 마애명과 적려유허비가 남아 있다.
    제주시 중앙로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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