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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 합호서원 (燕東 合湖書院)-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제2호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4. 1. 17. 20:24
연동 합호서원 (燕東 合湖書院)- 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제2호
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제2호
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제2호
종목
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제2호
명칭
연동 합호서원 (燕東 合湖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1동/ 63.6㎡ 지정일
2012.12.31 소재지
세종 연동면 원합강1길262-6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안승표,순흥안씨합강종중 설명
안향의 뜻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안향(1243∼1306)은 고려시대의 이름난 학자로 호는 회헌이다. 고려 원종 1년(1260)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렬왕 12년(1286) 원나라의 주자학을 전해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이다.
합호서원은 조선 숙종 42년(1716)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때(재위 1863∼1907)에 폐쇄되었다가 1927년 다시 세웠다.
사당에는 회헌 안향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9월 12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제2호
세종특별자치시문화재자료 제2호
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고려시대의 명신(名臣)•학자. 경상북도 풍기출신. 처음 이름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불렀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호 회헌은 만년에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안부(安孚)의 아들로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 禹氏)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 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이어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 2월에 원(元)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에 제수되었고,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을 거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의 공주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畫像)을 그려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명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지밀직사사를 다시 거쳐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98년 당시 원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충선왕이 즉위하자 그는 집현전태학사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충렬왕 복위후에는 수국사에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남경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四書)•주자서 등을 구하게 하였으며, 같은해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고 박사(博士)를 두어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육영재단과 같은 성격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게 하였다. 이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한 후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에 그를 위해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http://yoksa.aks.ac.kr/jsp/cc/View.jsp?cc10id=C000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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