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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장군 갑옷 (鄭地將軍 甲衣)-보물 제336호
    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3. 12. 12. 17:34

    정지장군 갑옷 (鄭地將軍 甲衣)- 보물  제336호

     

    보물  제336호보물  제336호

     

    종목

    보물  제336호

    명칭

    정지장군 갑옷 (鄭地將軍 甲衣)

    분류

    유물 / 생활공예/ 복식공예/ 의복

    수량

    1 착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광주 북구  비엔날레로 111,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용봉동)

    시대

    고려시대

    소유.관리

    정씨문중,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설명

    갑옷이란 싸움터에서 적의 화살이나 창,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었던 보호 장비로, 이 갑옷은 철판과 철제 고리를 엮어 만든 경번갑이다.

    정지장군 갑옷(鄭地將軍 甲衣)의 주인인 정지장군은 고려 충목왕 3년(1347)에 태어나,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웠으며 공양왕 3년(1391)에 세상을 떠났다. 이 갑옷은 장군이 왜구를 물리칠때 직접 착용했던 것으로 후손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총 길이 70㎝, 가슴둘레 79㎝, 소매길이 30㎝로 세로 7.5∼8㎝, 가로 5∼8.5㎝의 철판에 구멍을 뚫어 철제 고리로 연결하였다. 앞면에는 철판 6조각을 한 줄로 연결한 것이 6줄이 있고 그 중 두 줄은 여미게 되어 있고, 뒷면은 7조각을 한 줄로 연결한 것이 5줄로 등을 가리게 하였다. 어깨와 팔은 철판없이 고리만을 사용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앞면 아래쪽에 약간의 손상이 있지만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갑옷으로 매우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보물  제336호보물  제336호

     

     

     

     

     

     

     

     

     

     

     

     

     

    복제품이란 표현이 없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940 

     시대
  • 성격
  • 성별
  • 생년
  • 몰년
  • 본관
  • 관련사건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  [정의]
    1347(충목왕 3)∼1391(공양왕 3). 고려 후기의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정지(鄭地)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초명은 준제(准提)이다. 1374년(공민왕 23)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낭장으로 전라도안무사로 발탁되었다.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하고, 이듬해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島元帥)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가 되었다. 정지는 1383년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경상도로 가서 합포의 군사를 모아 정비하였다. 이때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도달하였고 그가 이끄는 군사와 박두양(朴頭洋)에서 대치하였다. 관음포전투에서 그는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이키〔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동참하였다. 이 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光州)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정지가 왜구를 물리칠때 직접 착용했던 갑옷이 후손에 의해 전해져 현재 보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지장군환삼(鄭地將軍環衫)이라 부른다. 여러 철판에 구멍을 뚫어 철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갑옷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75 나주 경렬사 -경렬공 정지(1347∼1391)를 배향하는 사우이다. 후에 정지(鄭地) 외에 유사, 고중영, 전상의, 고경조, 정충신, 유평, 유성익 등 7인을 더 모셔 팔현사라고도 부른다. 

    광주 북구 망월동 산 83-2 경렬사-

    경열사는 고려말의 용장 정지 장군(鄭地 將軍)을 모신 곳으로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정지(1347-1391)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로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자리잡고 있는 분토마을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경렬사는 1644년(인조 22년)에는 지금의 동구 동명동 74번지에 있었는데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그곳에 유허비만 세워졌었다. 지금의 경렬사는 ‘정지 장군 유적보존회’에서 1978년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에 완공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철골기와로 된 팔작지붕이다. 현종 10년(1644)에 지금의 동명동에 경렬사를 세우고 배향하였으나 1871년 3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리게 되었다. 정지 장군은 고려말의 무관으로 초명은 준제(准堤), 시호는 경렬(景烈)이며 나주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14년(1365) 사마시에 장원하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에 나아갔다.
     
    공민왕 23년(1374) 중랑장이 되어 수군에 대한 헌책을 올려 수군을 창설케 하였으며, 우왕 3년(1377)에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를 침범한 왜적 18급을 목베고 3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영광.광주.동복 등에 다시 왜적이 나타나자 뒤를 쫓아 옥과에서 적을 불태워 죽이고 말 100필을 얻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전라도순문사, 해도도원수, 영광·전라·경상·강능도 도지휘처치사, 문하평리 등을 지내면서 왜구를 소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지 장군은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하자, 고려 왕실을 붙들다가 유배되었고 뒤에 광주에 은거하여 45살의 나이로 한을 품은 채 죽었다. 1980년 국비와 지방비를 투자 묘소 앞에 사당과 경앙문, 충의문, 관리사무소 등과 주차장을 비롯한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 예장석묘는 광주시 기념물 제 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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