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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암사의 은행나무 (龜巖寺의 은행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21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8. 25. 21:31

    (龜巖寺의 은행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21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121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121호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121호

    명칭

    구암사의 은행나무 (龜巖寺의 은행나무)

    분류

    자연유산 / 천연보호구역/ 문화및자연결합성/ 경관및과학성

    수량

    1주

    지정일

    2004.09.10

    소재지

    전북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 산94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구암사,순창군

    설명

    이 은행나무는 조선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구암사를 방문했던 일을 기념하고 조선 태조의 안녕과 왕조의 번창을 염원하는 뜻에서 심었다고 전한다. 나무의 높이는 36m이고 가슴둘레는 5m이며, 수형이 곧고 건장하다. 열매는 10월쯤 수확하며 약용이나 약재로 사용한다.

    구암사는 백제 무왕37년(서기 636년)에 창건, 조선태조 원년에 중창하였으며 무학대사가 이곳을 방문했을때 붓처럼 우뚝 솟은 문필봉을 가리키며 후세에 선승과 문인이 많이 배출될 것을 예언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예언과 같이 화엄종주 백파선사와 설파선사, 영호 박한영 스님 등 불교계의 거두가 많이 배출되었다.

    6.25 전쟁때 사찰 및 주변의 숲이 많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은행나무는 피해를 입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구암사의 은행나무 (龜巖寺의 은행나무)

               

    구암사의 은행나무 (龜巖寺의 은행나무)

     

     

     

     

     

     

     

     

     

     

     

     

     

     

     

     

     

     

     

     

     

     

     

     

    1830(순조 30)∼1894(고종 31). 조선 후기의 승려.      
    화엄종주(華嚴宗主). 성은 조씨(趙氏). 호는 대응(大應). 한양(漢陽) 출신. 9세에 부모를 잃고 홀로 지내다가 12세 때 금강산장안사(長安寺)에 들어가서 승관(勝寬)을 은사로 삼고 일민(日敏)을 계사(戒師)로 삼아 출가하였다.
    그 뒤 일선(一禪)의 밑에서 참선을 하는 한편 윤선(侖璇)으로부터 교(敎)를 배웠다. 1851년(철종 2) 보운암(普雲庵)에서 개강(開講)한 뒤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고, 오대산·설악산 등의 절에서 설법하면서 많은 승려들을 지도하였다.
    특히 화엄학(華嚴學)의 묘한 이치를 통달하였으므로 화엄종주라고 불리었다. 항상 쉼없이 홀로 기도하였는데, 어느 날 밤 삼불(三佛)에 정례(頂禮)하다가 천수(天水)를 받은 일이 있었고, 원통선회(圓通禪會)에서는 무량수여래근본주(無量壽如來根本呪)를 염송하였는데, 꿈에 금강주(金剛呪)를 받았다.
    또한 화장고굴(華藏古窟)에서는 준제주(準堤呪)를 읽었는데 꿈에 수많은 용(龍)이 물을 뿜어 전신을 씻어주었다고 하며, 항상 차륜(車輪)이 구르는 것을 보는 등 기도의 영험이 컸다고 한다. 
    화엄종주 설파당 대선사  무장(高敞)출신으로 19세에 선운사에서 희섬(希暹)스님에게 득도(得度)하고 호암체정(虎巖體正)의 법을 이음. 화엄경(華嚴經)에 능통(能通)하여 청량징관(淸凉澄觀)의 화엄초의 소과(疏科)를 해석하고 판각(板刻)하여 80여권을 낙안(樂安)의 징광사(澄光寺)에 비치하였다. 판목(板木)이 불타자 다시 판각하여 영각사(靈覺寺)에 경판각(經板閣)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말년(末年)에 영원암(靈源庵)에서 10년동안 염불(念佛)을 일과(日課)로 삼다가 입적(入寂)하였다.

     

    이상언(

     

    1707(숙종 33)∼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승려.      
    화엄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호는 설파(雪坡), 속성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다가 19세에 선운사(禪雲寺)로 출가하여 희섬(希暹)의 제자가 되었고, 연봉(蓮峰)체정(體淨)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 한때 벽암(碧巖)의 법계(法系)에 속하는 회암(晦庵)의 지도를 받았으나, 특별히 섬긴 스승은 체정이다. 1739년(영조 15) 용추사(龍湫寺)에서 개강(開講)하였는데, 그때 이미 삼승오교(三乘五敎)를 남김없이 참구하여 통달하였으며, 그 중 특히 화엄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때까지 중국의 청량(淸凉)이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90권이 우리나라 화엄학 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있었으나, 내용이 광범하고 심오하여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달리 해석되어 오해를 낳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청량의 소에 대한 주석을 읽고 소를 가르고 각 장(章)을 분류했다. 또한, 『화엄경』의 여러 판본들이 서로 다른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해인사에 있는 모든 판본들을 교합하여 80권본의 정본(定本)을 만들어서 낙안(樂安)징광사(澄光寺)에 봉납하였다.
    그 뒤 금강산·묘향산·두류산 등지에 머물면서 참선(參禪)에 힘을 기울여 교와 선을 함께 닦았다. 1770년(영조 46) 징광사에 불이 나서 화엄판목(華嚴板木)이 모두 타버리자 구송(口誦)으로 과거에 이룩했던 80권본을 다시 판각하게 하였으며, 영각사(靈覺寺)에 경판각(經板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노년에는 매일 만 편씩 염불하기를 10여년 동안 계속하였고, 1790년 12월 병세를 보이다가 이듬해 1월 3일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法臘) 66세였다. 다비 후 제자들이 사리를 거두어 영원사와 선운사에 탑을 세웠다.
    법맥(法脈)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상언으로 이어지며, 뛰어난 제자로는 긍선(亘璇)·성우(性瑀)·홍주(洪倜) 등이 있다. 저서로는 『청량초적결은과(淸凉鈔摘抉隱科)』 1권과 『구현기(鉤玄記)』 1권이 있으나 현존 여부는 미상이다. 그는 ‘화엄의 충신’이라고 불릴 만큼 화엄의 전통을 고수한 고승이다.

     

     
    박한영(朴漢永)
    1870년(고종 7)∼1948년. 일제강점기 승려. 자는 한영(漢永)이고, 호는 석전(石顚)이며 불명(佛名)은 정호(鼎鎬)영호(暎湖)이다. 전라북도 완주(完州)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위봉사 금산스님을 찾아가 출가하면서 정호(鼎鎬)라는 법명을 받았다. 26세에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스님에게서 법통을 받고 법호를 영호(暎湖)라고 하였다.27세부터 해인사(海印寺), 법주사(法主寺), 범어사(梵魚寺)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석전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조선불교를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통합하려 하자 이를 저지시켰다. 1913년에는 불교잡지인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의 혁신과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일깨웠다.

    1946년까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8‧15 해방 후 조선불교 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정읍 내장사에서 만년을 보냈다.

    저서로 『석전시초(石顚詩抄)』『석림수필(石林隨筆)』『석림초(石林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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