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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견훤묘 (傳甄萱墓)-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8. 17. 15:45
전견훤묘 (傳甄萱墓)-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종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명칭
전견훤묘 (傳甄萱墓)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고대 수량
2,973㎡ 지정일
1981.12.21 소재지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 시대
소유.관리
사유,김병국 설명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위치한 이 묘는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867∼935)의 것이라고 전해온다. 견훤의 원래의 성은 이(李)씨이며, 상주 사람으로 신라 장군 이자개의 아들이라 한다.
신라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몇몇 신하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봉기가 심해졌다. 이때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40여년간 다스렸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 전주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해 등창이 나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전견훤묘 (傳甄萱墓)
전견훤묘 (傳甄萱墓)
아자개(阿玆蓋)
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 상주지방의 장군. 아자개(阿慈介)·아자개(阿慈个)·아자개(阿字蓋) 또는 원선(元善)이라고도 한다.
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 李磾家記》에 의하면,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인으로는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 있었으며, 자식은 5남1녀(혹은 아들 4형제라고도 함.)가 있었으니 장남이 바로 견훤(甄萱)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권50 견훤전에서도 견훤의 아버지가 아자개로 되어 있다. 아자개는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그도 885년(헌강왕 11)∼887년(진성여왕 1)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그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918년(태조 1)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였다. 다만, 《고려사》 태조 1년 9월 갑오조에는 9월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바, 이 때문에 견훤은 아자개의 아들이 아니며, 양자는 출신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세력이라는 견해도 있다.견훤(甄萱)
867∼935. 후백제의 시조. 재위 892∼935. 1.가계본래 성은 이(李)씨이었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의 농민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 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 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2. 신라 왕실의 문란과 후백제의 성립
자랄수록 체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이때는 신라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하여 점거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문란하여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草賊)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고 자칭하고, 북원(北原:지금의 原州)의 적수(賊首)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지금의 全州)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특히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龔直)이 고려에 투항하여 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어구에 침입하여, 100여척의 전함을 불태우고 3백여필의 말을 잡아왔다. 그리고 934년에는 운주(運州)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였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내다가, 양검을 강주(康州:지금의 晉州)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지금의 光州)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이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몄다.
935년 3월에 신검에게 금산사에 유폐당하고 금강은 죽었다. 금산사에 석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이어 신검·양검·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쌓인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는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 불사(佛舍)에서 죽었다.'문화재 > 내가 본 시도기념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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