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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암서원
    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13. 6. 22. 11:53

    근암서원

     

    문경근암서원소장유물 (聞慶近巖書院所藏遺物) 일괄/4종 834점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7호이나 감히 보여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근암서원은 1665년(현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3년에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6년에 이구(李榘)·이만부(李萬敷)·권상일(權相一)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9월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홍언충(洪彦忠):1473(성종 4)∼1508(중종 3).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 득우(得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손(孝孫)이고, 아버지는 참찬 귀달(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또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해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상주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自挽辭)』가 있다.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 16)∼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부사과(副司果) 수충(守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진경(振慶)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량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이듬 해서총대(瑞葱臺)의 응제(應製)에서 장원을 했고, 이 외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 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했다 한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김홍민(金弘敏):1540(중종 35)∼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임보(任甫), 호는 사담(沙潭). 예강(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윤검(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 범(範)이며, 어머니는 찬녕조씨(昌寧曺氏)이다. 홍미(弘微)의 형이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삼사(三司)를 거쳐, 1584년 이조좌랑으로 삼사와 같이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였다. 사인(舍人)에 이어 1590년 전한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규합하여 충보군(忠報軍)이라 칭하고 상주에서 적의 통로를 막아 적군이 부득이 호서지역으로 통행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중년 이후로 주자서(朱子書)와 『심경(心經)』·『근사록( 近思錄)』을 탐독하였고 역학에도 뜻을 두었으며, 역사서로는 주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었다.

     

    홍여하(洪汝河):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경삼(景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덕록(德祿)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호(鎬)이며, 어머니는 고종후(高從厚)의 딸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周易口訣)』·『의례고증(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彙纂麗史)』·『동사제강(東史提綱)』·『해동성원(海東姓苑)』·『경서해의(經書解義)』 등이 있다.

     

    이구(李榘):1469(예종 1)∼1526(중종 21).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사미정(四美亭). 제현(齊賢)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창평현령 공린(公麟)이며, 어머니는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예조좌랑·고성현감·면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무오·갑자사화 때 동생 원(黿)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화를 당하는 것에 연좌되어 홍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이조좌랑·호조정랑·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응교(應敎), 동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충주·홍주·상주의 목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직한 뒤 홍천 결은리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 뒤 향리에 사미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청절한 생활을 하였다.

     

    ·이만부(李萬敷):1664(현종 5)∼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학자.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관징(觀徵), 아버지는 예조참판 옥(沃)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승지 동규(同揆)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지취(志趣)가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심취하였다.

    1678년(숙종 4) 15세 때 송시열(宋時烈)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濁南)에게 몰려 북청(北靑)에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누대(累代)를 서울에서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그곳에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1729년(영조 5)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는 평소에 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 등 5현(賢)의 진상(眞像)을 벽에 걸고 존모하였으며, 이황(李滉)을 정주학의 적전(嫡傳)으로 존숭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견해도 주리적(主理的)인 경향을 보인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 20책 외에 『역통(易統)』 3권, 『대상편람(大象便覽)』 1권, 『사서강목(四書講目)』 4권, 『도동편(道東編)』 9권, 『노여론(魯餘論)』 1권 등이 있다.

     

    ·권상일(權相一):1679(숙종 5)∼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근암리(近菴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달의(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해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해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733년 양산군수·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이듬해 상소해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했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해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했다. 그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창립해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하였다.
    1741년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해 사헌부헌납·사간원사성·사헌부집의·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판결사(判決事)·홍문관부제학·한성좌윤·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李滉)을 사숙해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 18권,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근암서원(近菴書院)에 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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