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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Cultural Heritage-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인릉-사적 제194호-19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5. 29. 23:46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인릉-사적 제194호 19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23th King Sunjo and his wife Queen Sunwon-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계유정난 발생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결,능제도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서울인릉 이공 1800~1834 1790(정조 14)∼1834(순조 34). 조선 제23대 왕.재위 1800∼183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이다. 정조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1800년(정조 24)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 11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 英祖繼妃 慶州金氏)가 수렴청정하였다. 1802년(순조 2) 10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王妃 : 純元王后)로 맞았다.1801년 대왕대비는 궁방(宮房)과 관아(官衙)에 예속되어 있던 공노비(公奴婢)를 혁파하고 서얼 유통(庶蘖流通)을 시행했다. 한편 정조 때부터 집권해 온 시파(時派)에게 보복하기 위해, 사교(邪敎) 금압을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신자들을 학살할 때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신유박해).1804년 12월 대왕대비가 물러나고 순조는 친정을 시작했다. 그 뒤에도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에는 경상·충청·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였다(을해박해). 1827년에도 충청·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했다.순조의 친정 뒤에는,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고 정치에 관여하게 된 국구(國舅) 김조순의 일문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이 확립되었다.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달순(金達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 등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전횡(專橫)과 뇌물을 받는 행위를 일삼았다. 이로써 인사제도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졌다.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틈타 1811년 평안도 용강(龍岡) 사람인 홍경래(洪景來)와 그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평안도 일대를 점령한 뒤 관군과 대결했다.그러나 이듬 해 4월 정주성(定州城)이 함락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이 해 한성에 도적과 거지떼가 들끓었고, 1813년 제주도의 토호 양제해(梁濟海)와 1815년 용인의 이응길(李應吉)이 민란을 일으켰다.1817년에는 유칠재(柳七在)·홍찬모(洪燦謨) 등의 흉서사건(凶書事件)이 발생했다. 또 1819년에는 액예(掖隷)와 원예(院隷)의 작당 모반운동(謀叛運動)이 일어났다. 1826년에는 청주에서 괘서사건(掛書事件)이 일어났다.급기야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순조 재위 34년 중 1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했다.한편 왕은 ≪양현전심록 兩賢傳心錄≫·≪사부수권 四部手圈≫·≪대학유의 大學類義≫·≪정조어정홍재전서 正祖御定弘齋全書≫·≪서운관지 書雲觀志≫·≪동문휘고 同文彙考≫ 등을 간행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다. 1827년에는 세자(世子 : 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하려 했으나, 1830년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했다. 1834년(순조 34) 11월 45세로 승하했다.수용(睟容 : 임금의 畵像) 4본이 있어 경모궁망묘루(景慕宮望廟樓)·경우궁성일헌(景祐宮誠一軒)·선원전(璿源殿)·영희전(永禧殿)에 각각 봉안되었다.시호는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다. 묘호는 순조(純祖)이다.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의 1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74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194호 사적 제194호 종목
사적 제194호 명칭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인릉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193,071㎡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산13-1)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헌릉관리소 설명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 2년(1400)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토지와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도 개혁하였으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국정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초기의 민생안정을 이룩하였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이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헌릉은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인석·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시대의 현릉·정릉, 조선시대의 후릉과 같이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었다.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고 비각을 세웠다. 세종 2년(1420)에 원경왕후가 죽음으로써 무덤지역을 정하였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에 따라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하였다.
인릉은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가 혼란했다.
인릉은 무덤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문·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언덕 아래에는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원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재실은 무덤과 같은 지역에 있는데 헌릉·인릉의 재실은 서로 떨어져 있다.
※(헌릉·인릉 → 서울 헌릉과 인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사적 제194호 사적 제194호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 #51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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