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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Cultural Heritage-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정릉-사적 제199호-10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5. 29. 15:36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정릉-사적 제199호 ⑩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11th King Jungjong-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왕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찬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계유정난 발생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나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서울 정릉 이역 1506~1544 1488(성종 19)∼1544(중종 39).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역(懌)이다.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윤씨(尹氏)이다.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년 9월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 : 학문을 일으키고자 유능한 젊은 관료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한 제도)·전경(專經) 등을 엄중히 시행하였다.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특히 1515년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해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道學)에 근거한 철인군주정치(哲人君主政治)를 표방해 기성 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려 하였다.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친히 김식(金湜) 등 유능한 신진 사류 28명을 뽑아 언론·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해, 이른바 이들 사림파(士林派)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반정공신(反正功臣)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를 계기로, 1519년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해 나라를 뒤집어놓았다고 주장해 기묘사화를 일으켰다.이를 계기로 신진 사림세력이 숙청됨으로써 개혁정치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대에는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고 각종 옥사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 심정·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 정계에 복귀한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파직되었다.이듬 해 3월에는 윤세창(尹世昌) 등의 모역사건이 일어났다.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심정·유자광(柳子光)을 제거하려고 일으킨 동궁의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경빈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이 쫓겨나 원사(怨死)하였다. 이렇게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하게 벌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1531년 그 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자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립해 중종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 형제가 등장해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해 김안로가 추방되었다. 이러한 척신의 대두는 마침내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의 전주를 이루기도 하였다.이처럼 중종대에는 정치적으로 조선 전기사회가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각종 모순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훈구세력과 신진 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 내의 갈등 및 훈구세력과 척신세력 간의 세력다툼 등이 일어났다.이러한 정국 불안은 국방정책에도 많은 혼란을 가져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1510년 4월 삼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이들은 한때 제포(薺浦)와 부산포(富山浦)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 등을 공격해 경상도 해안 일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다.일본의 아시카가(足利) 막부의 간청으로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였다.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를 반감하였다. 또한 항거왜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엄격한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왜변(倭變)이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 추자도(楸子島) 왜변과 동래염장(東萊鹽場)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 왜변이 대표적이다.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해 인마(人馬)를 약탈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한편, 북방 국경지대에서는 야인(野人)들의 침탈이 잦아졌다. 1512년는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야인들이 침입해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4군(四郡)지대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六鎭)지대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였다.또한 의주산성(義州山城)을 수축해 북방 방어에 노력하였다.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적극적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야인들은 생활 여건이 나은 6진·4군지대로 침입해 때로는 만포첨사(滿浦僉使)가 피살되는 등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이처럼 남왜북로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자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고,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였다. 비변사는 변방에 외침이 있을 때,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들이 모여 방어를 의논하던 임시 합좌회의기관이었다. 그러나 뒤에 영설(永設) 합좌기관으로 발전해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으로서 성격이 바뀌어 갔다.이 밖에도 한때 무학(武學)을 설치하고, 편조전(鞭條箭)·벽력포(霹靂砲) 등을 제작해 외침에 대비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과 함께 군사 질서가 허물어져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이 행해지는 등 조선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모순들이 노출되었다.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 도덕윤리가 정착되어 갔다. 조광조 등을 등용한 초기에는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였다. 또한 도성 안의 요승(妖僧)·무가(巫家)를 적발해 처치하고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향약을 전국에 설치하였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일시 주춤했으나, 그 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이륜행실 二倫行實≫·≪속삼강행실 續三綱行實≫ 등을 간행해 국민 교화에 힘썼다. 중종 말년에는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고,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한 영은문(迎恩門)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를 정착시켜 나갔다.오랜 재위 기간 동안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해 많은 구리활자를 주조해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이 편찬, 간행되었다.즉, 최세진(崔世珍)·신용개(申用漑)·이행(李荇)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四聲通解≫·≪속동문선 續東文選≫·≪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다. 1536년에는 찬집청(撰輯廳)을 설치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고, 역사·지리·언어·문학·사회의 각 방면의 문헌들을 편찬, 간행하였다.≪경국대전≫·≪대전속록≫ 등을 간행하였다. 1540년에는 역대의 실록을 등사해 사고(史庫)에 배치하였다. 또한 1542년 근정청(斤正廳)을 설치해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이듬 해 7월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을 완성, 반포해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였다.경제면에서는 저화(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였다. 1522년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해 악포의 유통을 막고, 두승(斗升)을 새로 만들어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한편, 1524년에는 전라도·강원도·평안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의복·음식·혼인 등에 대한 사치를 금지했으며, 관리들이 신래자(新來者)를 포악하게 다루는 것을 금지하는 등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과 잦은 외침 등으로 실효를 크게 거둘 수가 없었다.특기할 만한 사실은 1530년 4월 당시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상의원(尙衣院)이 무역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는 지배층의 의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도 발달하였다. 즉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간의혼상(簡儀渾象)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였다.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해 이두석(泥豆錫)·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배워 오게 하였다. 1536년에는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해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또한 1538년에는 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해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였다. 시호는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는 중종(中宗)이다. 능호는 정릉(靖陵)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74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등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북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척결,능제도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199호 사적 제199호
종목 사적 제199호 명칭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정릉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98813.19㎡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삼성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선릉관리소 설명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재실(齋室)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선릉·정릉 →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사적 제199호 사적 제199호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정릉-사적 제199호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정릉-사적 제199호 #51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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