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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orld Cultural Heritage-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선릉-사적 제199호-9
    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5. 29. 14:34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선릉-사적 제199호 ⑨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9th King Seongjong and his wife Queen Jeonghyeon-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9대 성종과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왕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찬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계유정난 발생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서울 선릉 이혈 1469~1494
    1457년(세조 3)∼1494(성종 25). 조선 제9대 왕.       
    재위 1469∼149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혈(娎).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德宗 : 세조의 長子로 追尊)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다. 천품(天禀)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에도 능해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그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1469년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貞熹大妃 : 世祖妃)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해 형 월산군(月山君)의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그를 왕위에 올렸다.
    즉위 할 무렵 그의 나이는 13세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그 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고, 1476년(성종 7)에 비로소 친정을 하였다.
    즉위하던 해 명나라 헌제(憲帝)의 고명(誥命)을 받았고, 세조 찬위의 전철을 우려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 이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성이 내외에 자자한 구성군 준(龜城君浚)을 유배시켰다.
    1474년에 덕종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하였다.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계비가 된 윤씨는 원자(뒤의 燕山君)를 낳고 왕의 총애가 두터워지자 여러 다른 빈을 투기할 뿐 아니라 왕에게까지 불손하였다. 이에 1479년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1482년에는 사사(賜死)했는데, 이는 뒤에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李克增)·어세겸(魚世謙) 등에 명해 ≪대전속록 大典續錄≫을 완성,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 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여주영릉(英陵 : 世宗의 능)을 참배, 왕래하는 연로(沿路) 군현의 조세를 반감해주었다. 수령과 변장의 임명 때에는 친히 인견(引見)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을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국초 이래의 규정을 완화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조신(朝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했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근왕세력(勤王勢力)으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鄕試)에서 사불양재(祀佛禳災)해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보내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연(經筵)을 통해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 연구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다.
    이 밖에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두모포(龍山豆毛浦)에 독서당(讀書堂, 일명 湖堂)을 설치,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제술(讀書製述)에 전념하게 하였다.
    편찬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노사신(盧思愼) 등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徐居正) 등의 ≪동국통감≫≪삼국사절요≫·≪동문선≫, 강희맹(姜希孟) 등의 ≪오례의≫, 성현(成俔) 등의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게 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 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다.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2만 4000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 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그의 묘호(廟號)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의 난숙에 따라 퇴폐의 풍이 싹트고 왕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뇌물도 성행하였다. 더욱이 규방(閨房)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 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일으키게까지 하였다.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아들 19인과 딸 11인을 낳았다. 제10대 왕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제11대 중종이 된 진성대군 역(晉城大君懌)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시호는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고, 묘효는 성종(成宗)이다.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광주(廣州)에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나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으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등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북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

     

     

     
    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척결,능제도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199호             사적 제199호  
     

     
    종목 사적 제199호
    명칭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선릉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98813.19㎡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삼성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선릉관리소
    설명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재실(齋室)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선릉·정릉 →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성종왕릉
    정현왕후릉
     
      사적 제199호             사적 제199호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선릉-사적  제199호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선릉-사적  제199호  

     

     

     

     

     

     

     

      

     

      

     

     

     

     

     

     

     

     

     

     

     

     

     

     

     

     

     

     

     

     

     

     

     

     

     

     

     

     

     

     

     

     

     

     

    성종왕릉 

     

     

     

     
     
     
     
     
     
     
     
     
    정현왕후릉 

    https://youtu.be/kh2b4BPNaSo

    https://youtu.be/RgjbiUSGc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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