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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사적 제127호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3. 4. 21. 20:08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사적 제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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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사적 제127호 명칭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
41,368㎡
지정일
1964.06.10 소재지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 시대
삼국시대 소유.관리
국,공,사유,진도군 설명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백제 때 진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 중 한 마을의 중심지가 이곳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부터는 왜구가 나타나서 노략질을 계속해 오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의 관청과 백성들이 내륙지방으로 피해서 살다가 세종대왕 초에 돌아오기도 했다. 결국 세종 20년(1438) 해안지방에 주로 설치되던 군사조직인 만호부가 이 지역에 생기게 되고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은 그 이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남아 있으며, 둘레가 400여m 정도이지만,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남도석성 → 진도 남도진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남도 진성은 고려 원종때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고 최후까지 격전을 벌인 성이라고 전한다. 고려시대 고종 이후 시작한 왜구의 침범이 연해 지방을 노략질 함으로써 충정왕 2년 (1350)에는 진도의 관부와 백성들은 내륙 영암지방으로 옮겨 조선시대 세종 19년(1437년)까지 피난생활을 하다 다시 귀향한 것이다.
이들 수군진들의 축성 연대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불리한 경상도 및 전라좌수영 관하의 수군진들이 1488년 (성종 19년)에서 1490년(성종 21년)까지 3년간에 걸쳐 축성되고 전라우수영 관하의 수군진들이 연산군 - 중종 연간에 축성된 점으로 미루어 볼때 성종 - 연산군 연간에 이 성이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도석성 본래의 규모는 그 둘레가 1,233자, 높이가 8자,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그러나 영조때 석축 둘레 1,040자, 높이 12자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성지가 거의 원형적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동문, 서문, 남문터가 있다. 현재 성의 총 길이는 610m, 높이는 5.1m다.이 성은 조선시대 수군진영의 진지로서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남도진성에 있는 쌍교와 홍교는 성의 외곽을 건너 다니기 위하여 축조한 것인데, 편마암의 자연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어 학계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문화재 > 내가 본 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