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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 최초의 사당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Chungminsa Shrine, Yeosu-사적 제381호
    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3. 4. 17. 00:38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사적 제381호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종목 사적 제381호
    명칭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제사유적/ 제사터
    수량 96,753㎡
    지정일 1993.06.01
    소재지 전남 여수시 덕충동 1808외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공유,사유,여수시
    설명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 때 목포, 노량, 당포, 한산도, 부산포, 명량 해전에서 왜적을 무찔러 우리의 바다를 지켰고, 선조 31년(1598) 노량에서 도망가는 왜적을 무찌르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글에도 재주가 있어 『난중일기』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전쟁터에서 읊은 시조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좋은 작품을 손꼽히고 있다.

    의민공 이억기(1561∼1597)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 갇히자 이항복·김명원들과 함께 무죄를 주장했으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충현공 안홍국(?∼1597)은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으며 이순신 장군의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정유재란 때 안골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이 사당은 선조 34년(1601) 나라를 위한 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의정 이항복이 임금께 청하여 통제사 이시언이 세웠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지하였다가, 고종 10년(1873)에 다시 세운 뜻 깊은 곳이다.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이순신 최초의 사당 여수 충민사 (麗水 忠祠)-사적  제381호  



     

    이순신 최초의 사당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사적  제381호

     

     

     

      

     

     

     

     

     

     

     

     

     

     

     

     

     

     

     

     

     

     

     

     

     

     

     

     

     

      이순신 최초의 사당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사적  제381호  






     

    이순신 최초의 사당 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사적  제381호

     

     

     

     

     

     

     

     

     

     

     

     

     

    이순신(李舜臣)에 대하여
    이순신(李舜臣)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수림(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1. 가계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변(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거(琚)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후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2. 출사와 관직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3. 왜침에 대비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4. 임진왜란 발발이듬해인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장졸을 이끌고 동래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5. 옥포대첩4일 새벽 출항을 하니, 이때 선척은 전선 24척, 협선(狹船)15척, 포작선(鮑作船)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화시(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안홍국(安弘國)에 대하여
    안홍국(安弘國)
    1555(명종 10)∼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신경(藎卿). 찬성사 문개(文凱)의 9대손이다.
    1583년(선조 16)에 두 형과 더불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으며 왕명을 받들어 각 진(鎭)을 다니며 왕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이해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 등으로 전공을 세웠다.
    1597년 보성군수로 3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의 휘하에 중군(中軍)으로 참전, 군무에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선〔舟師〕 30여척을 이끌고 안골포(安骨浦)·가덕도(加德島)의 적주둔지를 공격하다가 안골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보성의 정충사(旌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이억기(李億祺)에 대하여
    이억기(李億祺)
    1561(명종 16)∼1597(선조 30). 임진왜란 때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수(景受). 연손(連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북방 오랑캐가 침입하였을 때 경흥부사로 임명되어 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591년(선조 24) 순천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수사가 되어,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하여 당항포(唐項浦)·한산도(閑山島)·안골포(安骨浦)·부산포(釜山浦)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전라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준비를 성원하는 한편,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자, 이항복(李恒福)·김명원(金命元) 등 조정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무죄를 극구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명령을 받고,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여 원균·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592년 6월 5일 당항포해전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공적은 이순신·원균 등과 다를 바 없었으나, 1592년 5월의 옥포(玉浦)·사천(泗川)·당포(唐浦) 등지의 초기 해전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관계로, 임진왜란 후 공신책정(功臣策定)때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으로 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었다.
    1600년 여수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석천사에서 관   

    https://youtu.be/lWT4-csTvyQ

    https://youtu.be/lWT4-csTvyQ?t=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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