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적비는 신라 제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비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아미타불상을 조성할 때 세운 비석이다. 건립 연대는 801년으로 추정되며 불상을 조성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914년에 절터 주변에서 비석 조각들이 발견되어 이 절이 무장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이곳에 병기와 투구를 감추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석은 파손이 심하여 절터에는 부서진 머릿돌과 받침돌과 남아 있고, 비석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비석 조각들을 참조하여 2011년에 몸돌을 다시 만들어 이곳에 세웠다. 두 마리의 용이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모양의 머릿돌에는 ‘阿彌陀佛□□(아미타불□□)’이라는 여섯 글자가 2행으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 왼쪽 면에는 1817년 4월 29일에 이곳을 답사하다가 이 비석 덩이를 발견하여 닥본한 김정희(金正喜)의 감회를 기록한 조사기(調査記)가 별도로 새겨져 있다. 받침돌은 두 마리의 거북 모양인데 거북의 등 중앙에는 몸돌을 끼울 수 있는 장방형의 받침이 있다. 받침의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는데, 거북 모양 받침돌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문화재 설명
신라 제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비이다. 이 비는 1760년 홍양호(洪良浩)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경주 내동면 암곡리에서 처음 발견하였으며, 그 뒤 소재를 알 수 없었다가 1817년 김정희(金正喜)가 비석 파편 2개를 찾았고, 1915년 비석 파편 1개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 세 조각의 비석 파편에 새겨진 글을 통해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임이 밝혀져 이곳에 무장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장사는 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세 조각의 비석 파편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절터에는 비받침과 비의 머릿돌, 그리고 2011년 비석 파편을 근거로 복원된 비석이 있다. 비받침은 머리가 2개로 구성된 점이 특이하며, 1개만 남아 있는 데, 이것은 2008년 인근 계곡에서 문화재청 직원이 수습하여 2011년 복원한 것이다. 등 중앙에 마련된 잘려진 비좌(碑座)는 비몸을 직접 끼워두는 곳으로 사각형이며,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잘려진 머릿돌에는 용이 구름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조각이 있고, 왼쪽 면에는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석비는 통일신라 전기에 만들어진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를 제외하고 그 이후 머릿돌이 남아 있는 예가 드문 상황에서 당시 머릿돌의 변화과정을 살필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