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분산성 金海 盆山城 사적 김해 분산성은 분산 정상부를 머리띠처럼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가야 시대에 쌓았다고 전해지나 현재의 산성은 고려 우왕 때 김해 부사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담은 비석이 현재 충의각에 남아 있다. 분산성 북문 안쪽에는 해은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절은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온 허황옥이 자신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 준 용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산성 남쪽 정상에는 신호를 전달하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조선 고종 9년(1872)에 그려진 「분산산성고지도」에는 5개의 봉으로 그려져 있으나 1998년에 과거의 모습을 추정하여 지금의 자리에 1개의 봉만 설치했다. 봉수대 뒤쪽의 큰 바위에는 조선 시대의 흥선 대원군이 쓴 ‘만장대(萬丈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해 분산성에서 선두로 왜적을 막았던 공로를 칭찬하고자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뜻에서 ‘만장대’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분산성은 김해는 물론이고 낙동강 하구와 남해안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해안 방어의 중요한 국방 시설로, 평지에서 방어가 어려우면 이곳에 들어와 성문을 굳게 닫고 장기전을 펼치며 성을 지키기도 했다. 동쪽 성벽을 발굴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축성* 일부가 확인되었고 서쪽 성벽 안쪽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집수지, 진아**, 무기고, 창고터가 발굴되어 「분산산성고지도」의 내용이 확인되었다. 또한 『김해읍지』에 의하면 분산성에 별장***을장수로 두고 승군을 편성하여 지휘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해은사에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속적인 복원 사업으로 성벽 둘레 929m 중에 서북 30m 구간은 무너진 대로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축성: 군사적 방어 시설인 요새,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쌓은 구축물인 보루, 포를 설치하는 시설물인 포대,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인 참호 등의 구조물. **진아(鎭衙): 군사상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인 진의 관아. ***별장(別將): 조선 시대 지방의 산성, 나루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직.
문화재 설명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분산의 정상에 둘레 약 900m에 걸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박위(朴蔿)가 수리하여 쌓은 뒤, 임진왜란(1592) 때 무너진 것을 고종 8년(1871)에 다시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 위의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도록 쌓았다. 서남부는 험준한 천연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현재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성 안에 이르는 통로는 산성 서쪽에 있는 계곡을 거쳐 북쪽 뒤편에서 들어가는 길을 이용한 듯 하다. 현재 성 안에 우물과 암자, 그리고 민가가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3기의 비석이 있다.
성 주변에는 가야 무덤들과 수로왕비릉, 가야의 건국설화와 관련있는 구지봉이 있어 이 성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