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 (서울 苑西洞 高羲東 家屋)-Go Hui-dong's House in Wonseo-dong, Seoul문화재/내가 본 국가등록문화재 2022. 8. 31. 13:02
분류 등록문화재 / 기타 / 인물기념시설 수량 2동, 1층, 연면적 155.1㎡ 지정일 2004.09.04 소재지 서울 종로구 원서동 16번지 시대 1955 등기 소유자 종로구청 관리자 종로구청 문화재 설명최초의 서양화가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근대적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고희동 선생이 살던 곳이다. 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지은 목조 기와집으로, 근대 초기 한국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국가등록문화재 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 (서울 苑西洞 高羲東 家屋) | 국가문화유산포탈 | 우리지역 문화재 (heritage.go.kr)
참고 : 원서동고희동가옥 | 카카오맵 (kakao.com)
1.고희동 - Daum 백과 2.고희동 - Daum 백과 3.
생애 및 활동사항
14세 때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 궁내부 주사로 취직하여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 이 무렵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 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하였다.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은 중국의 화보(畫譜: 그림을 모아서 만든 책)를 충실히 임모(臨模: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환멸을 느낀 그는 궁내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으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西洋畫科)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에 들어갔다. 이것이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서양화 제작이 되었다.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1915년 귀국하자 그는 신미술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다.
1918년 당시 서화계의 중진과 대가들을 종용하여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하였다(초대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서화협회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회원 작품전으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전시회였다. 회원전과 더불어 계몽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書畫協會報)』를 창간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에서」라는 작품을 서양화부, 「여름의 시골」이라는 작품을 동양화부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회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 그 뒤 줄곧 서화협회만을 이끌었다.
1936년 제15회전을 끝으로 서화협회가 더이상 열리지 않을 때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한국민주당에 가입,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을 지냈다.
'문화재 > 내가 본 국가등록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네스코회관 (0) 2022.09.02 서울 연세대학교 핀슨관 (0) 2022.09.02 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 (서울 新堂洞 朴正熙 家屋)Park Chung-hee's House in Sindang-dong, Seoul (0) 2022.08.24 영암선 개통 기념비 (榮巖線 開通 紀念碑)-Monument for the Opening of the Yeongam Railroad Line (0) 2022.07.14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尹東柱 遺稿 保存 鄭炳昱 家屋)-Jeong Byeong-uk's House in Which Yun Dong-ju's Manuscript Collection is Preserved (0) 2022.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