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사 대웅전은 단층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5칸이란 정면 칸수는 현존하는 조선후기 불전 가운데서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한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 불전, 특히 주불전은 중층구조를 취하거나 정면 3칸 이상의 간살이 주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뒤 17세기 이후에 들어서 재건하게 되지만 이전의 규모를 회복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찰의 전각이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경향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전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시각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제 역할을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 전각이 유형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추세 속에서 5칸 규모로 주불전을 재건한 송림사 대웅전은 그 규모만으로도 3칸 불전이 주류인 다른 사찰과 차별되는 가치로 인정된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5칸 불전은 사례가 많지 않고 현재 대부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보호받고 있는 현실도 고려될 배경으로 판단된다.
송림사 대웅전은 1649년에 재건하면서 평면 구성에 있어서 동시기에 재건된 불전과는 불단과 후불벽 위치, 간살 구성에서 고식 특색을 견지한 점이 두드러진다. 불단이 대웅전 중앙에 있으며, 규모는 거대한 편으로 크기는 가로 13m, 세로 2.44m, 높이 1.03m이며, 전면에는 화려한 부조 조각을 새겼다. 중앙 세 칸에 불단이 점유함으로써 사실 5칸 불전이지만 송림사 대웅전의 실내 예불공간은 일반 불전에 비해 넓다고 보기 힘든 결과가 되었다. 실내에서 의례를 거행하게 되면서 실내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고 자연스레 고주열을 뒤로 물려(이주법) 불상 전면의 예불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변화한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었으나, 송림사 대웅전은 배면쪽 고주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가로 폭은 세 칸 너비에 맞춰 불단을 배치함으로써 실내 중앙부를 점유한 평면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주칸 설정은 만복사지 서금당, 무량사 극락전 등의 건물에서 보이는 고식기법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송림사 대웅전의 공포는 살미에 쇠서가 없는 형태로 교두형 공포로 분류된다. 이런 유형의 공포 양식은 비교적 시기가 올라가는 편으로 조선후기에는 널리 쓰인 방식은 아니다. 이 시기에 교두형 공포를 채택한 건물은 송림사가 자리한 팔공산 일대에 교두형 공포를 쓴 건물들이 집중 건립된 점은 하나의 특색으로 판단되는데, 그 근간에 승장 각원(覺元)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기술과 기법을 계승한 승장들이 이들 지역의 건물을 지었다는 분석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공포 외에도 이들이 지은 건물은 구조면에서도 영향 관계를 확인할 수 있어 향후 심도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구 부재를 지속하여 사용한 1850년 중수공사인데, 상량문의 내용과 재사용한 부재로 보면 이 시기 공사는 여러 부분에서 이전 대웅전과는 건축의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 재목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대웅전의 부재 즉 옛 재목을 이용하여 공사를 마무리 하였는데 이때 수리를 거치면서 지붕형식이 팔작지붕에서 맞배집으로 개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850년 중수공사는 신 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출발한 중수공사였고 구부재를 적극 사용하면서 건축형태의 변모라는 결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조선후기 주불전에서도 이런 실상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송림사 대웅전은 건축부재의 흔적과 상량문이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록 없이 부재만으로 추정하는 다른 불전과 차별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