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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희경 촌은집 목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6. 2. 7. 16:30

    유희경 촌은집 목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72호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명칭

    유희경 촌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

    52매

    지정일

    1979.12.29

    소재지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소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용문사

    설명

    이 책판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유희경(1545∼1636)의 시집인『촌은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만든 판목이다.

    유희경은 조선 전기의 시인으로, 남언경의 문인이었다. 특히 상례에 밝아 국상은 물론 평민의 장례까지 그에게 문의해왔다. 또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돕기도 하였다.

    『촌은집』은 그의 시문집으로 시(詩), 창(唱), 전기(傳記)와 한문학의 문체 가운데 하나인 묘표(墓表), 묘지명 등을 수록하였으며, 3권 2책으로 판각된 책판 수량은 52매이다. 유희경의 손자인 유자욱이 편집, 정리하고 김창협이 서문을 붙였으며, 유희경이 증손자 유태웅이 남해 용문사에서 다시금 발간한 책판이다. 이것은 거의 300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러는 썩고 마멸되었다. 조선시대 상례의 자료인만큼 그 점이 특히 문화재로서의 아쉬움이 남는 것이라 하겠다.     

     

     

     
     

     

               

     

     

     

     

     

     

     

     

     

     

     

     

     

     

     

    문화재청자료

     

     

     

    유희경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성별
    • 생년
    • 몰년
    • 본관
    • 집필자
     
     
    [정의]
    1545(인종 1)∼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시인.
    [개설]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아버지는 종7품인 계공랑(啓功郎) 유업동(劉業仝)이고 어머니는 허씨(許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宣祖)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또 중국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戶曹)의 비용을 모두 쓰게 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내쫓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려고 그에게 상소(上疏)를 올리라 협박했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른 뒤에 그 절의를 높이 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 받았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했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던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장례의식에 특히 밝았으므로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가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허균(許筠)『성수시화(惺叟詩話)』를 살펴보면,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
    천민 출신이나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했으며 자기 집 뒤의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유명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했다. 그때에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3권이 전하며 그 밖의 저서로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아들 유일민(劉逸民)의 원종(原從: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으로 인하여 자헌대부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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