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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사적 제55호-세계문화유산이 되다.Sosuseowon Confucian Academy, Yeongju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6. 1. 28. 13:43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사적 제55호
서울 암사동 유적 (서울 岩寺洞 遺蹟)
종목 사적 제55호 명칭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18,657㎡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번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소수서원,영주시 설명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소수서원 → 영주 소수서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2010.10.17.18시 24분 방문했으나 방문 시간을 넘겨 들어갈 수 없었다. 따뜻한 날 다시 방문해야지.
2019.06.30 12:40에 다시 방문했다.
주세붕
1495(연산군 1)∼1554(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증사복시정 상빈(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손(長孫)이고, 아버지는 문보(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1537년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 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박(博)을 양자로 삼았다.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 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청백리에 뽑히었고, <도동곡 道東曲>·<육현가 六賢歌>·<엄연곡 儼然曲>·<태평곡 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저서로 ≪죽계지 竹溪誌≫·≪해동명신언행록 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 進獻心圖≫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안향
1243(고종 30)∼1306년(충렬왕 3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경상북도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출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글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부(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성윤(成允)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였다.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1275년(충렬왕 1)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1289년 2월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해 11월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그해 3월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1294년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그해 12월 지밀직사사,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그해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1298년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제가 개혁되어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그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 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고, 이듬해 수국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1300년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1303년 밀국학학정(國學學正)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해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1304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해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금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 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또한 그는 자신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이룩하려 하였다. 그가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하여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다면, 그를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로 보기보다는, 적극적 의미에서 ‘주자학 수용자’로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1306년 9월 12일 별세하자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1542년(중종 37) 풍기군수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또한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임강서원(臨江書院)을 세웠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안축
1282(충렬왕 8)∼1348년(충목왕 4). 고려 후기 문신·문인.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할아버지는 안희서(安希諝), 아버지는 안석(安碩)이며 어머니는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죽계(竹溪 : 지금의 풍기)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사대부의 한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에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했다. 그곳에서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려에 돌아와 성균악정(成均樂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됐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됐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됐다. 그러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다시 파직됐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전법판서(典法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됐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1344년(충목왕 1)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다음 해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냈다. 1347년(충목왕 3)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돼 양전(量田: 세입을 위해 토지를 측량하는 일)에 참여했다.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명성이 높았다. 강원도존무사로 있을 때에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을 담아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있을 때에는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수정·보완했다. 충렬(忠烈)·충선(忠善)·충숙(忠肅)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전한다.1347년에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됐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안보
1302년(충렬왕 28)∼1357년(공민왕 6). 고려 후기의 문신.본관은 흥녕(興寧), 자는 원지(員之). 아버지는 석(碩)이며, 형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축(軸)이다.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 광주사록(廣州司錄)에 임명되고, 다시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을 거쳐 편수관(編修官)을 역임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 겸 승발가각고(遼陽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노모(老母)를 위해 귀국하였다. 이해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이듬해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를 역임하였다.그 뒤 우대언 겸 집의(右代言兼執義)를 거쳐 충정왕 때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52년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이어 감찰대부제조전선사(監察大夫提調銓選事)를 지냈다. 1355년밀직제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고려시대 과거시험관)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진사(進士)를 뽑았으며, 이해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려고 하자 고향인 흥녕 가까이서 일을 볼 수 있도록 동경유수(東京留守)에 제수되었다.항상 청렴한 생활을 하였으며, 형인 축과 함께 안향(安珦)을 제향(祭享)한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무량수전의 기품과 풍기 인삼의 진한 향을 품은 곳, 경북 영주 여행 ㅣ 한국 재발견 (KBS 20120310 방송)'문화재 > 내가 본 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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