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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서원 (臨皐書院)-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6. 1. 1. 12:38
임고서원 (臨皐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종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명칭
임고서원 (臨皐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9,299㎡
지정일
1985.10.15 소재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21필 시대
소유.관리
임고서원
설명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정몽주( )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운관(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몽주라 고쳤다.1357년(공민왕 6)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1363년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였다. 돌아와서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旌閭: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이듬해예조정랑(禮曹正郎)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 현재 일본의 큐수지역)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 전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상태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는 바람에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세워 이듬해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臺諫)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였으며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1391년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살해되었다.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그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나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하고 있다.대사성(大司成)이색(李穡)은 그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그는 고려 말의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 나더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참고 [삼은각 : http://blog.daum.net/shinh-k79110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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