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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서원 (德巖書院)-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6호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5. 10. 30. 18:04
덕암서원 (德巖書院)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6호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6호
명칭
덕암서원 (德巖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1동
지정일
1994.04.16
소재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유월3길 29-72 (유월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설명
경산 이씨인 이천배·이천봉·이주를 추모하기 위해 도내 유림에서 세운 건물이다.
이천배와 이천봉은 형제 사이로 함께 정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중 이천봉은 정묘호란 때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벼슬을 지냈다.
조선 현종 13년(1672)에 세운 이 서원은 처음에는 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 담당하는 덕암사로 세웠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가, 고종 13년(1876) 덕암서당으로 고쳐 세우면서 교육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문 격인 건명문을 들어서면 남동향으로 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만들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지붕에서 느끼는 완만한 곡선이 돋보이는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이천배 (李天培)
자 경발(景發) 호 삼익재(三益齋) 생년 1558(명종 13) 졸년 1604(선조 37) 시대 조선중기 본관 경산(京山) 활동분야 학자 > 유학자 [상세내용]
이천배(李天培)에 대하여
1558년(명종 13)∼1604년(선조 37).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경발(景發)이고, 호는 삼익재(三益齋)이다. 본관은 경산(京山)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이다.
부친 이침(李忱)과 모친 이수(李樹)의 딸 광주이씨(光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김흥우(金興宇)의 딸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오건(吳健)과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수학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서사원(徐思遠)‧여감호(呂鑑湖) 등과 서신왕래로 교유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傳心)하니 모든 선비들이 공경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져 여러 번 벼슬의 천거를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근 향리에 천곡서원(天谷書院)을 중건하고, 평생 경전을 연구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인으로 졸재(拙齋) 정추(鄭錘)‧학유(學諭) 이연현(李廷賢) 등이 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진주(李震柱)‧이진동(李震棟)‧이진양(李震樑)‧이진재(李震材)이다.
성주군의 덕암서원(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묘는 성주군에 있다.[참고문헌]
嶠南誌
淸陰集
歸溪遺稿[집필자]
김경희이천봉(
1567(명종 22)∼1634(인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경산(京山). 자는 숙발(叔發), 호는 백천(白川).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형 천배(天培)와 함께 정구(鄭逑)를 사사하였으며, 1620년(광해군 12) 정구가 죽자 그의 원묘(院廟 : 신주를 모시고 제향하는 사당)를 짓고 신도비의 건립과 문집간행에 노력하였다.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 공으로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성주 덕암사(德巖祠)에 향사되었다.이주( ?)
자 신언(愼彦) 호 학가재(學稼齋) 생년 1599(선조 32) 졸년 1669(현종 10) 시대 조선중기 본관 경산(京山) 활동분야 기타 > 처사 부 이천증(李天增) 조부 이순(李恂) 증조부 이팽석(李彭錫) 처부 성변규(成辨奎) [상세내용]
이주(李?)에 대하여
1599년(선조 32)∼1669년(현종 10). 자는 신언(愼彦), 호는 학가재(學稼齋). 본관은 경산(京山). 증조부는 이팽석(李彭錫)이며, 조부는 이순(李恂)이고, 부친은 이천증(李天增)이다. 외조부는 경주이씨 이증달(李曾達)이고, 처부는 창녕성씨 성변규(成辨奎)이다.
성주 덕암사(德巖祠)에 향사되었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취학하여 겨우 성동(成童)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일컬었다. 한 가지 말을 듣고 한 가지 행실을 보면 문득 사모하고 본받아서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스승이 돌아가시자 수암(修菴) 유진(柳袗),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와 선생의 후사를 다스리매 법도에 맞음을 강구하여 복상(服喪)을 예대로 하였으며 더욱이 후진을 인도하는 데 능하여 당대의 석학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참고문헌]
嶺南人物考[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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