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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함묘및신도비 (金德함墓및神道碑)-경기도기념물 제144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5. 9. 15. 15:45
김덕함묘및신도비 (金德함墓및神道碑)
경기도기념물 제144호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144호
명칭
김덕함묘및신도비 (金德함墓및神道碑)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
1기
지정일
1993.10.30 소재지
경기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산1번지 시대
소유.관리
상산김씨충정공파종회
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 성옹(醒翁) 김덕함(1562∼1636) 선생의 묘소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었으나 스스로 학문에 힘써 선조 21년(1588)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인조 14년(1636)에는 대사헌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초토사 이정임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으며, 광해군 9년(1617)에는 이항복·정홍익 등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 남해로 유배되었다.
묘의 좌우로는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돌기둥)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있다. 묘 아래쪽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던 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유가 쓴 것이다. 부인인 경주 이씨와의 합장묘로 두 번의 이장(移葬)을 거쳐 현종 1년(1660)에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비문의 내용은
http://blog.daum.net/khaesal4081/5450989
앞에는 김연 묘
김덕함 묘
김연, 김덕함
경화(景和), 성옹(醒翁), 충정(忠貞) 김덕함(金德諴)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 부모를 잃었으나 스스로 문예에 힘써 1587년(선조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다시 진사가 되었으며, 158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이항복(李恒福)의 후원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延安)에서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듬 해 행재소인 정주까지 왕을 호종, 그 공으로 공조좌랑이 되었다.
1594년 임시로 군공청(軍功廳)을 세워 전쟁의 공과를 실시할 때 비변사낭청을 제수받았다. 이 밖에 예조와 공조의 좌랑과 비변사낭청·호조정랑·직강·사예 등의 중앙관직과 선천·청풍·단천·성천·장단·안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597년 일본의 재침으로 분조(分曹)가 세워지자 호조정랑으로서 분호조정랑(分戶曹正郞)을 겸임해 군량 조달에 힘썼다.
광해군 때 군기시정에 이르렀으나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정홍익(鄭弘翼)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으며, 명천·온성·사천 등지에 이배되었다.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집의와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와 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 대사헌에 올랐다. 이 때 왕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김공량(金公諒)의 신원을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號召使)로 활약했으며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청백리로 뽑혔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성옹유고≫가 전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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