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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懲毖錄)-국보 제132호문화재/내가 본 국보 2015. 6. 10. 15:32
징비록 (懲毖錄)
-국보 제132호
종목 국보 제132호 명칭 징비록(懲毖錄)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고본 수량 1책 지정일 1969.11.12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퇴계로 1997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유영하,한국국학진흥원 설명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용산전쟁기념관에서
국학진흥원을 가야하는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아산 현충사에서
부산시립박물관에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16권 7책. 목판본. 국보 제132호.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이 책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 7년 간의 기사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이다. 그리고 외손 조수익(趙壽益)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손자가 조수익에게 부탁해 1647년(인조 25)에 간행했으며, 자서(自敍: 자신이 쓴 서문)가 있다.
한편, 처음 간행은 1633년 아들 진(袗)이 『서애집(西厓集)』을 간행할 때 그 속에 수록했고, 10년 뒤 다시 16권의 『징비록』을 간행해 이후 원본의 체재를 갖추었다는 설도 있다.
책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 관계에 있어서 교린사정(交隣事情)도 일부 기록했는데, 그것은 임진왜란의 단초(端初: 실마리나 배경)를 소상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징비록』은 16권본 이외 이본(異本)으로 일종(一種)이 있다. 『근포집(芹曝集)』·『군문등록(軍門謄錄)』을 제외한 『징비록』 본문과 『녹후잡기(錄後雜記)』만으로 된 2권본(二卷本)인데, 간행 연대의 선후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쓴 『징비록』의 서문에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아닌게 아니라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둘 곳을 알지 못해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했으니, 임진년(1592)에서 무술년(1598)까지의 것으로 모두 약간의 분량이다. 이에 따라 장계(狀啓: 관찰사나 왕의 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올리는 글)·소차(疏箚: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차자)·문이(文移: 상급 관청과 하급 관서 사이에 오가는 공문) 및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부록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본 2권은 내용이나 체재가 결본(缺本: 일부가 빠졌거나 없어진 책)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초간 『징비록』본에 자손들이 『근포집』과 『군문등록』을 빼놓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은 『징비록』 2권, 『근포집』 2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 2권 및 『녹후잡기』로 되어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기록한 것으로, 저자의 손으로 된 관계 문서가 붙어 있다.
『근포집』은 저자가 올린 차자(箚子) 및 계사(啓辭: 죄를 논하는 글)를 모은 것이고, 『진사록』은 임진년(1592)에서 계사년(1593)까지 종군(從軍)하는 동안의 장계를 수록한 것이다.
그리고 『군문등록』은 1595년부터 1598년까지 저자가 도체찰사로 재임할 때의 이문류(移文類)를 모은 것으로 여기에 자서와 자발(自跋: 자신이 쓴 발문)이 들어 있다. 『녹후잡록』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저자가 듣고 본 사실들을 수필 형식으로 기록한 글이다.
1695년(숙종 21)에 일본 경도(京都) 야마토야(大和屋)에서 중간(重刊)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종가의 소장본인 저자 자필의 필사본을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1집에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이라는 제목으로 300부를 영인했으며, 195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서애집』 끝에도 영인되어 있다. 『광사(廣史)』 3집에도 『징비록』과 『녹후잡기』가 합쳐 4권으로 수록되어 있다.
1957년과 1958년이민수(李民樹)의 번역이 『현대문학』 제3·4권에 연재되었고, 1975년 이동환(李東歡)이 『징비록』 1·2권과 『녹후잡기』를 번역해 삼중당(三中堂)에서 출간하였다.
저자 자신은 이 책자를 가리켜 “비록 볼만한 것은 없으나 역시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고 겸양해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저자의 위치나 책의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임진 전란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5088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임진(壬辰)·정유(丁酉) 왜란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사실을 기록한 책.
16권 7책. 목판본. 이 책은 현재 4종이 전하는데, 저자 자신의 필사 원본인 〈초본징비록 草本懲毖錄〉(국보 제132호)과 16권으로 된 〈징비록〉, 2권으로 된 간본(刊本), 필사본이 있다. 저술 및 간행 연도는 알 수 없다. 저술 연도는 1604년(선조 37)경이고, 간행 연도는 〈운양잡록 雲陽雜錄〉에 따라 저자의 외손 조수익(趙壽益)이 경상감사가 된 1647년(인조 25) 직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자서에 밝혀진 편차에 의하면 이는 16권본의 서문이 분명하므로 2권본이 가장 늦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의 '징비'는 〈시경〉에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16권본에 따라 내용을 살펴보면, 권1·2는 전쟁의 원인과 상황을 약술한 것인데, 전전(戰前)의 조·일 관계, 관군의 붕괴, 의병의 봉기, 한산도 해전, 명군의 원병, 강화교섭, 종전(終戰)의 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권3~5에는 〈근포집 芹曝集〉이란 편명으로 1592~96년의 군국정무에 관한 차(箚)·계(啓) 등의 문건을 수록했다.
권6~14에는 〈진사록 辰巳錄〉이란 편명 아래 임진·계사 두 해 동안의 장계(狀啓)를 수록했다. 임진년 10월의 장계는 전국 각지에서의 전쟁의 시기별·국지별 상황과 그 대책을 조목별로 진술한 것이다. 권15·16은 〈군문등록 軍門謄錄〉·〈녹후집기 錄後集記〉이다. 〈군문등록〉은 저자가 4도체찰사(四道體察使)로 재직하던 1595~98년의 기간중 각 도의 관찰사·순찰사·병사 등에게 통첩(通牒)한 문건과 자서(自敍)·자발(自跋)을 수록했다. 주된 내용은 병사들의 군사훈련·지역방비·세금문제·식량조달·창고설치 등 국방과 정치 전반에 관한 포괄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권말의 '녹후잡기'는 당시의 일을 개괄적으로 논평한 것이다. 〈징비록〉은 제목에서 보이듯 뚜렷한 목적의식과 저자가 왜란의 전기간 동안 국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몸소 경험한 바를 기초로 하여, 전란의 대책을 세우는 가운데 얻어진 풍부한 사료와 지식을 담은 것이기에 가치가 매우 크다. 난중의 사실이나 인물평은 당색에 구애됨이 없이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전란의 기록임에도 단순히 전쟁의 진행과정만을 적은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경제·외교 관계 등 전체적 구조하에서 서술했다. 임진왜란 관계의 사료로는 국내에 〈선조실록〉·〈임진장초〉·〈용사일기〉 등이 있고, 중국과 일본에도 몇 가지가 있지만 〈징비록〉만큼 체계적·종합적이지 않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20j1406a
1542(중종 37)∼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蘋)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다.편서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해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546
징비록 (懲毖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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