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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암사 (龜岩祠)-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1호
    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5. 5. 13. 18:55

    귀암사 (龜岩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1호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1호

    명칭

    귀암사 (龜岩祠)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

    2

    지정일

    1985.12.31

    소재지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340번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박의영

    설명

    박중영·박훈·박사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이들의 충절과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지방 유림들과 그의 후손들이 세운 건물이다.

    박중영 선생은 조선 예종과 성종 때 문신으로 조선 전기 문물을 정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인 박훈 선생은 연산군과 중종 때 공조좌랑 지평을 거쳐 동부승지를 지냈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성주, 의주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손자인 박사현 선생은 임진왜란 때 청주성을 지키는데 공을 세우고 전사한 충신이다.

    해마다 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안내판에는 구암사라 기록되었다.

    그곳에서 부르는대로 구암사라 했어야

     

     

     

     

     

     

     

     

     

     

     

     

     

     

     

     

     

     

     

     

     

     

     

     

     

     

    1415(태종 15)∼1482(성종 13).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개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 우(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석융(碩隆)이고, 아버지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구주(九疇)이며, 어머니는 전주부윤 권담(權湛)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6세에 독서를 시작해 9세에 글을 짓고, 1441년(세종 23) 진사·생원 두 시험에 이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경창부승(慶昌府丞)과 성균주부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춘추관기주관으로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해 ≪고려사≫의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직제학에 승진, 이듬해 집현전이 폐지되자 좌보덕(左輔德)에 전임,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제학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구현시(求賢試)에 급제,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사헌에 재직 중 ≪오륜론 五倫論≫을 지어 바쳤다.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했으며, 1469년(예종 1) 지중추부사·홍문관제학·춘추관사를 겸직해 ≪세종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에 재임하다가 지춘추관사가 되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으로 승진했으며 이 해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였다.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6조에 걸쳐 역임하는 동안에 문교(文敎)에 끼친 공로는 제외하고라도, 정치 의견과 언론 어느 것이나 다 당시를 일깨우고 후세의 거울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그를 ‘해동의 제갈량(諸葛亮)’이라고까지 하였다.
    항상 역사의 현실에 착안해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했고, 당시에 사리를 가장 똑바로 이해한 경륜가였다.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떠받드는 시절에 단군을 국조로 모셔 받들기를 주장했으며, 중국의 역사만을 일반 교과서로 사용하던 시절에 우리의 동국사(東國史)도 배울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온 세상이 중국의 풍속에 휩쓸리는 때에 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문신이면서도 군비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우리 나라에는 문묘는 있으나 무묘(武廟)가 없으니 마땅히 무묘를 세워 역대의 명장을 모시자고 주장하였다.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봄에는 3월 3일, 가을에는 9월 9일에 교외에서 사격 대회를 열어 사기를 드높이고 무풍(武風)을 장려하자고 했으니, 확실히 당시 사회로 보아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군정 10책(軍政十策) 가운데서도 특히 군호(軍戶)의 중요성을 강조해, “신라의 풍속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자는 벼슬을 한 등 올려주어 명예롭게 하고, 유가족들은 관록으로써 부양해 우대하였다. 그러니 위국진충(爲國盡忠 :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함.)의 용사들이 생겨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전사자에게는 특별한 은전이 없고 마땅히 주는 부미(賻米 : 賻儀로서 주는 쌀)까지도 받기가 어렵다. 이러고서야 어찌 군졸들의 모험심을 고취시킬 수 있으랴. ”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군정의 여러 가지 결함을 명석하게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의견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무인을 멸시하는 폐풍이 교정되지 못한 채로 500년간을 내려왔다. 정병주의(精兵主義)를 주장해 양보다 질에 더욱 치중해 반드시 시험을 치러 우수한 군사를 뽑도록 하였다.
    또 병역의 토대가 되는 호적의 정확성을 기할 것, 독자의 군복무 면제 등을 징병의 3대 원칙으로 삼은 것은 탁월한 의견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좋은 방안을 수립하였다. 그 중에서 비변10책(備邊十策) 같은 것은 국방에 관한 근본 방침을 상술한 것이니, 이 또한 그의 대표적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팔도지리지≫≪연변방수도 沿邊防戌圖≫는 매우 정확해 실제로 측량한 지도가 없던 당시로서는 매우 위대한 공헌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농정에도 힘을 써서 농사의 근본은 지력(地力)을 잘 이용하는 데 있으므로 개간 사업을 일으켜서 해변과 강·육지에도 방축을 세워 수전(水田)을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직업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밖에 여가가 있을 때는 무예를 익히게 하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건의하였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일이 이상에 치우친 듯하지만 전혀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민생을 위해 소극적으로는 민폐를 제거하고, 적극적으로는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킬 여러 가지 건의를 했는데, 그 중에도 특히 각 도·군·현에 의료 기관의 설치를 주장한 것은 참으로 감탄할만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질병은 백성들의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그나마 서울에는 의원들이 있어 병을 진단하고 약을 주기도 하지만 지방에는 그렇지 못해 촌의 백성들이 한번 질병에 걸리면 그 괴로워함은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방의 크기에 따라 의원의 수를 정해 전의감에 와서 의술을 연구한 뒤 각 지방에 돌아가 병을 돌보게 하고, 감사에게 그 성적을 보고하게 해 상벌을 주면 이처럼 좋은 방법은 없다고 하였다.
    사회 정책에 대하여도 한층 진보적인 의견을 가졌다. 예컨대, 백정(白丁)에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며, 노비에게만 힘든 역을 치중하지 말고 균등하게 하자고 주장한 것 등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비의 폐지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당시 시대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풍속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혁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혼례를 간단하게 하고 연찬(宴饌)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과거 시험에 대하여도 과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하였다.
    예술 방면에도 깊은 이해를 가져 아악을 잘 보호하자고 했으며, 우리 나라와 중국의 악부(樂部) 외에 또 번악부(藩樂部)란 것을 따로 설치해 일본악과 여진악을 아울러 채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서적12사상소문 書籍十二事上疏文>은 도서의 보존 및 간행에 실효를 꾀하자는 내용으로서 현대적 의의를 함축한 주장이었다. 언제나 그렇겠지만 문화가 담긴 서적의 보존은 사회 문화의 존속을 위한 중대 사명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서적은 비록 흩어져 없어진다 해도 구할 수 있지만, 우리 나라의 문사(文史)는 한번 유실되면 다시는 얻을 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책은 반드시 여러 권을 만들어 여러 사고(史庫)에 보관해 두자고 하였다.
    사실 조선 500년을 통해 학자와 문인이 많았고 정략가(政略家)와 모신(謀臣)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개는 정주(程朱)의 학설과 반고(班固)·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모방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대의명분을 구실로 강경 외교를 부르짖거나 인의(仁義)만으로 국방의 근본을 삼으려고 하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자국의 현실을 바로 보고 백년대계는 세우지 못할망정 한 나라의 정치를 마음 굳게 먹고 잘 해가자는 실제적 경륜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는 조선이 한창 번성할 때에 배출한 인물 중 현실적 경륜가로서 색다른 존재라 하겠다.
    저서로는 ≪눌재집 訥齋集≫외에 주의(奏議)에 관한 10전과 어명으로 엮은 ≪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동국도경 東國圖經≫·≪농잠서 農蠶書≫·≪목축서 牧蓄書≫·≪유선서 諭善書≫·≪황극치평도 黃極治平圖≫·≪팔도지도 八道地圖≫·≪양계방수도 兩界防戍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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