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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 (宋時烈 肖像)-국보 제239호문화재/내가 본 국보 2015. 3. 30. 18:53
송시열 초상 (宋時烈 肖像)
- 국보 제239호
종목
국보 제239호 명칭
송시열 초상 (宋時烈 肖像)
분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
1폭
지정일
1987.12.26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국립중앙박물관
설명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초상화이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고 평생 주자학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이었다.
이 초상화는 가로 56.5㎝, 세로 97㎝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그리고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에서는 학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 오른쪽에는 그가 45세 때 쓴 글이 있고, 윗쪽에는 정조가 쓴 칭찬의 글인 찬문이 남아있다. 이 두 글에 의해 그의 나이 45세 때 그려진 것이라고도 하고, 깊은 주름과 하얗게 센 수염은 노년의 모습으로 그가 살아있을 때 노년의 모습을 그린 본을 따라 정조 때 옮겨 그려진 것이라고도 한다. 옮겨 그려진 것이라 하더라도 화공의 솜씨가 뛰어나며 명암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표현한 강한 눈매와 숱 많은 눈썹, 붉은 입술 등에서 그의 성품이 보이며 옷의 흑과 백의 대조는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고 그곳에 봉안하기 위한 이모본들이 제작되었는데 현재 5점이 전해지며 그 중에서 이 그림이 제일로 손꼽힌다.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복제품
충장공 지여해장군의 외손자 우암 송시열 (宋時烈 ; 1607~1689)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나며, 아버지 송갑조의 아들이며 수지공 지여해 池汝海 (?~1636)의 외손자이다. 옥천(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으로 옮겨가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기묘록>>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충청도 연산의 김장생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생활은 뒷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시강원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국구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그는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1689년 1월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다음해에는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 김장생의 예학 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 정치 사상을 정립하였고,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되었다.
한편, 그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 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치의 원리를 <<대학>>에서 구하였는데, 그것은 수기치인으로 표현된다. 즉,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는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실제의 정책면에 있어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즉,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궁중의 연악과 토목공사를 억제하며, 공안을 바로잡고, 군포를 감하여 양민의 부담을 줄이며, 사노비의 확대를 억제하여 양민을 확보하며, 안흥에 조창을 설치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정쇄신책은 이이의 변통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생안정과 국력양성 문제는 그 자체가 당면한 급선무였기도 하지만, 그는 이것이 북벌 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인식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에서 또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철학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그는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다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을 줄이고 민병을 활용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3년으로 할 것인가,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른바 제1차 예송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기년설(1년)을 주장하여 이것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기년설에 대하여 대공설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그의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송시열은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또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우선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 노비종모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또 서북지방(평안도 함경도)인재의 등용과 서얼의 허통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효행 정절 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하였다. 사회풍속면에서는 중국적 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 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혼례 등의 예속과 복식,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세속과 다른 중국습속들을 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학통을 이어 받은 권상하 김창협 등이 고제로 일컬어진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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