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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구연서원관수루 (居昌龜淵書院觀水樓)-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5. 2. 28. 17:29
거창구연서원관수루(居昌龜淵書院觀水樓)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 명칭 거창구연서원관수루
(居昌龜淵書院觀水樓)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1 동 지정일 2005.01.13 소재지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거창신씨요수종중 설명 관수루는 서원의 문루로 1740년 창건되었으며 자연암반을 활용하고 틀어진 재목을 하부기둥으로 사용하는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형태 또한 대단히 아름다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암반 사이에 조성된 가ㄷ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움.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움. 누하부 정면에 출입을 위한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공간은 모두 개방하였음. 상층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르 깔았고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렀음.관수루는 자연과 하나였다. 자연속에 또다른 자연이다.
樂水 신권(愼權)
1501년(연산군 7)∼1573년(선조 6) 12월 23일.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언중(彦仲),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 훈도(訓導)를 지냈다.
아내는 은진임씨(恩津林氏)로 지평에 증직된 진사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의 딸이다.
학행이 있었다. 안의(安義)의 야담(夜潭)에 살았다. 구암(龜岩) 이정(李楨), 갈천(葛川) 임훈(林薰)과 여러 날 학문을 강마하다가 더러는 시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인조 연간에 후손 신경직(愼景稷)이 성팽년(成彭年)의 후손 성경창(成慶昌) 등과 함께, 신권이 1540년(중종 35)에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던 향교 근처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신권‧성팽년을 향사하였는데, 1694년(숙종 20)에 귀연서원(龜淵書院)으로 명명되었다. 이 서원은 현재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다. 1645년(인조 23)에 신경직‧성팽년은 사우 건립 문제로 1645년(인조 23)에 경상도감사의 보고에 의하여 죄를 받기도 하였다. 현감 박장원(朴長遠)이 이 사우를 철거한 재목으로 정여창(鄭汝昌)이 세웠던 제월당(霽月堂)을 옛터에 옮겨 지은 일이 있었는데, 박장원이 체임되어 돌아가자 신경직 등이 다시 제월당을 부수었기 때문이다.
묘는 안의현 초점(草岾) 선영(先塋) 아래에 있다.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묘표를 짓고, 유척기(兪拓基)가 전(篆)을 지었다.
집필자 : 이원배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9999_1_0018153&isEQ=true&kristalSearchArea=B석곡(石谷) 성팽년(
[정의]
1540(중종 35)∼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옹(頤翁), 호는 석곡(石谷). 안음(安陰) 출신. 아버지는 교위(校尉) 한량(漢良)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있었다.그러던중 1569년(선조 2)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거창·현풍 등 경상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이 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의약(醫藥)·복서(卜筮)·산경(山經)·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분야도 두루 섭렵하였다. 지평에 추증되고, 안의(安義)의 구연사(龜淵祠)에 제향되었다. 집필자 :황고(黃皐)신수이(慎守彛)
자는 군서요 호는 황고로 자호는 취한 당이며 본관은 거창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학문이 깊어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화림지는 그를 일러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친병에는 상분(변을 맛본다는 뜻) 혈지(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린다는 뜻)하였고 당상에는 시묘(묘 밑에 우막을 지어 상기를 치르는 것) 철죽(죽만 마시는 것)하였다 하였으며, 그의 유적비문에는 효가 돈독하여 친환에는 하늘에 빌었고 손가락을 끊어 정성을 다하였으며 거상에는 묘려하여 진래하기를 전후6년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고장의 유현이다.
http://wbook.geochang.go.kr/bbs/board.php?bo_table=08_13&wr_id=7https://youtu.be/l3-jc4YR5cM?t=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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