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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진 행곡리 주명기 정려각
    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15. 2. 26. 11:09

    울진 행곡리 주명기 정려각

     

     

     

     

     

     

     

     

     

     

     

     

     

     

     

    호 : 치암 / 致庵 자 : 정보 / 正甫 朱命杞

    생애이야기

    치암(致菴) 주명기(朱命杞)는 1748년(영조 24)에 울진 구만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주덕주(朱德胄)이며, 모친은 담양전씨 전경유(田景洧)의 딸이다. 그의 가계는 6대조인 충효당 주경안이 뛰어난 효행을 보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충효의 가문이다.
    주명기는 천성이 영리하고 효성스로운 성품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웃어른의 명에 순종하며 부모의 명에 게으르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서당에 다니며 경서에 능하니 어른들이 감탄했다. 주명기의 부모는 그가 경서에 능하고 글재주를 보이자 당시 문학과 경전으로 이름을 날린 죽암(竹巖) 윤득관(尹得觀, 1710~?)) 문하로 보낸다. 주명기는 여기서 사제의 예를 갖추고 ?소학?과 경전, ?주역?을 수학한다. 윤득관은 1738년(영조 14) 무오식년사마시(戊午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교부(敎傅)를 지냈다. 윤득관은 어유봉(魚有鳳)에게 경학을 배우고 박창원(朴昌元)에게 시를 배웠다. 젊어서는 성균관(成均館)에서 시로 이름을 날렸으나 노년에는 경전에만 몰두하였다.
    주명기는 죽암 윤득관(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서울에서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했다. 특히 김매순(金邁淳, 1776~1840)․성대중(成大中, 1732~1812)과 경학을 논하고, 당시의 정세를 논했다. 이 무렵 주명기는 성대중과 교유하면서 당시 젊은 학자들로부터 대세를 이루던 실학에 눈을 뜬 것으로 짐작된다. 그와 경학을 논하던 김매순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덕행과 문장이 뛰어나,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예조참판과 강화부유수를 지냈고,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다. 덕행과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지지했다. 저서로는 『대산집』,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이 있다.
    또 청성(靑城) 성대중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 1792년 문체반정(文體反正) 때 노론계 북학자로 분류되며 고문(古文)을 중시했다. 저서로는『청성집(靑城集)』이 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주명기는 부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낙향한다. 그는 주야로 부친의 병간호에 열성을 다한다.
    주명기의 극진한 효성을 「치암공실기(致菴公實記)」에서는 “부친 나이 73세에 우연히 전신불수의 병을 만나 몸을 움직이고 잠자리에 누움에 몸소 할 수 없게 되어 수저로 음식을 먹여주고 안아서 눕히고 일으켜야 함에 한 번도 어긴 일이 없고 밤에는 자지 않고 낮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아니함에 무릇 9개월을 하루같이 하였고 우스개 말과 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대개 그것은 부친의 뜻을 상할까 해서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치암공실기」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병에 보약은 붕어가 제일 좋다 하므로 때가 한 겨울철이라 못의 얼음을 깨고 그물을 쳐 놓고 새벽에 나가보니 12마리가 걸렸다. 그 후로 날마다 잡아서 계속하여 봉양하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화하여 일이 미루어진 바라고 하였다. 매일 조석으로 부친의 밥상을 돌보고 드시도록 하였으나 혹 종일토록 드시지 않기도 하였다. 다음 해 3월에 부친의 병이 더 깊어 치료하기 어려움에 이르렀다. 공이 황망히 작은 칼을 꺼내서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부어 넣었으나 민망히도 효험이 더디어 또 다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미음에 타서 먼저 맛보고 드리니 조금 후에 회생하여 이미 끊어질 명이 22일간 연장되었다가 끝내 상을 맞이했다.”라고 전한다.
    주명기는 만년 이후 고향인 구만동에서 주로 경학과 역학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후학양성에 매진한 듯하다. 이는 낙향하기 전 서울에서 김매순, 성대중과 더불어 강론하면서 익힌 실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장동유(張東維)는 그의 문인 중에 대표적인 학자이다.
    「치암공실기」는 그의 이 같은 생활을 “장례 후에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들어앉아서 오직 효경, 소학, 근사록, 성리서 등을 일심으로 공부 탐구하여 역리학에 몰두하였다. 도서를 반복적으로 상세히 익혀 한 점, 한 획이라도 확실히 분별했으며, 만변저성 두 권을 홀로 익혀 오묘함을 살폈다. 즉 하도는 영허요 낙서는 진퇴라 이기상승과 강유마탕의 해설이 이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주명기는 1808년(순조 8) 2월에 60세를 일기로 본가에서 임종했다. 1828년(순조 28)에 그의 후학들과 문중에서 호조에 ‘정려를 내려줄 것’을 건의하여 1868년(고종 5)에 정려를 받았으며, 1875년(고종 12)에 통정대부

     

     

     

    朱命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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