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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충의당 (寶城 忠義堂)-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8호문화재/내가 본 시도민속자료 2015. 1. 25. 11:16
보성 충의당 (寶城 忠義堂)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8호
보성 충의당 (寶城 忠義堂)
종목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8호
명칭
보성 충의당 (寶城 忠義堂)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근대주거/ 근대가옥
수량
3,293㎡
지정일
2012.12.27
소재지
보성읍 보성리 751-3
시대
일제강점기
소유
관리
김금용
설명
충의당의 건립 시기는 상량문의 확인을 통해 1937년, 근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민가의 사랑채로 지어졌다가 사우의 강당으로 용도가 변용되어 특정 목적을 지닌 건조물로서 희소성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건물을 구성하고 있는 평면과 단면 등의 건축구조로 보아 건축적 의의가 있고, 대부분의 구조부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보성 충의당 (寶城 忠義堂)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
pplId=PPL_5COc_A9999_1_0021091&curSetPos=0&curSPo
s=0&isEQ=true&kristalSearchArea=B
생졸년 미상. 고려 말의 관리. 호는 퇴휴당(退休堂) 또는 용암(龍庵)이다.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시조이다.
고려말에 명(明)나라의 학사(學士)로서 홍무 15년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였다.82년(우왕 8)에 전라도 보성에 왜구가 침입하자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집필자 : 전종헌
평양공(平襄公) 선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971
1434(세종 16)∼1479(성종 10). 조선 전기의 무신.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명여(明汝).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광유(光裕)이고, 아버지는 증 우찬성 의화(宜和)이다.1451년(문종 1) 무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56년(세조 1) 12월 경흥부사로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1457년 3월 경상좌도수군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를 거쳐 안주목사·한성부윤·판종성부사(判鐘城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를 수행, 그의 신임을 얻었다. 10월에는 회령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한명회의 추천으로 증질(增秩)되었다.1463년 4월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이듬해 정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4월에는 다시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1465년 정월에 경상도제언순찰사(慶尙道堤堰巡察使)가 되어 경주 북천(北川)의 제언 수축에 공을 세웠다. 6월에는 의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절도사 김겸광(金謙光)과 뜻이 맞지 않아 교체되었다.1467년 정월 비록 무장이지만, 성품이 염간(廉簡)하다고 하여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선군(船軍) 동원을 적극 주장하였다. 같은 해 7월 형조참판으로서 1,000인의 군졸을 이끌고 오자경(吳子慶)·한계미(韓繼美) 등과 1진을 이루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이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황해도병마사·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동시에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 6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녹훈되었다.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8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유성군에 다시 봉해졌다. 그러나 1473년 2월 영안북도절도사로 있을 당시 올적합(兀狄哈)이 온성 지방에 침입했으나 이를 구원하지 못했다고 하여 군기실오(軍機失誤)의 죄를 입어 고신(告身)을 회수당하였다.이듬해 5월 사헌부·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특명으로 고신을 돌려받고, 그 뒤 유성군으로 북방에 대한 변사(邊事)에 자문하는 등 한가하게 지냈다. 1477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도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집필자:차문섭
친친재(親親齋) 선거이(
1550(명종 5)∼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무신.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판서 형(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상(祥)이다. 1569년(선조 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진도군수를 역임하고 이어 청백(淸白 : 맑고 깨끗한 행세)으로 성주목사를 거쳐 1591년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7월에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병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 때 크게 부상당하였다.이어 다음해인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또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수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병사가 되었다.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울산 전투에 참가, 명장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에서도 서로 도와 이름이 높았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집필자 : 김석희
1576(선조 9)∼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 아버지는 참의 봉장(鳳章)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광해군 10)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받았다.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당상관이 된 뒤에 홍주영장(洪州營將)·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장흥의 포충사(褒忠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집필자 : 권인혁
1579(선조 12)∼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무신.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백종(伯宗). 퇴휴당(退休堂)윤지(允祉)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부사(府使) 의문(義問)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1631년(인조 9)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이와 함께, 금편(金鞭 : 금으로 도금한 말의 채찍)·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갑옷)·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다. 뒤에 평산부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집필자 : 권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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