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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잠비 (申潛碑)-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05호
    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5. 1. 1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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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05호

     

     

     

     

                   
     

     

    종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5호

    명칭

    신잠비 (申潛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84.04.01

    소재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산길 1 (태창리)

    시대

     

    소유.관리

    온락희

    설명

    태인 현감을 지낸 영천자 신잠 선생의 어진 정치와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신잠(1491∼1554)은 조선 중종 14년(1519) 현량과에 급제했으나, 기묘사화로 인해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 20여년간 은거하며 글과 그림에만 전념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지내었고, 상주목사로 있던 중 목숨을 다하였다. 문장과 서화에 특히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비는 높은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세웠는데, 비몸돌의 윗변 양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비문은 비바람에 글씨가 많이 닳아 있어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우나, 신잠의 공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중종 39년(1545)에 만든 것으로, 그의 공을 잊지 못한 이곳 주민들이 후대에 널리 전하고자 세워 놓은 것이다.

     

     

     
     

     

               

     

     

     

     

     

     

     

     

     

     

     

     

     

     

     

     

     

     

     

     

     

     

     

     

     

     

     

     

     

     

     

     

     

     

     

     

     

     

     

     

     

    상주목사,태인현감 신잠(申潛)

    [정의]

    1491(성종 22)∼1554(명종 9). 조선 전기의 화가.
    [내용]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가 양주(楊州)로 이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났다.
    그 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중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尋梅圖)」「화조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집필자 : 홍선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25

    [정의]

    1486(성종 17)∼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중군사정(中軍司正) 희(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다.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석주(碩珠)의 딸이다.
    [내용]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술활동]
    저서로는『양곡집(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집필자 : 이찬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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