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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 (茂朱 九千洞 一士臺 一圓)-명승 제55호
    문화재/내가 본 명승 2015. 1. 4. 18:26

    ( ) -명승  제55호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 (茂朱 九千洞 一士臺 一圓)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 (茂朱 九千洞 一士臺 一圓)  
     
     

    종목

    명승  제55호

    명칭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茂朱 九千洞 一士臺 一圓)

    분류

    자연유산 / 명승/ 역사문화명승/ 

    수량

    51,922㎡

    지정일

    2009.09.18

    소재지

    전북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로 1868-30, 등 (두길리)

    시대

     

    소유.관리

    무주군

    설명

    고종 때의 학자 연재(淵齊) 송병선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은거하여 서벽정(棲碧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며 소요하던 곳으로, 이 고장 선비들이 송병선을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는 뜻의 동방일사(東方一士)라 한데서 비롯되었으며, 푸른 바위의 깨끗하고 의젓함을 들어 일사대(一士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구천동의 제6경인 일사대(一士臺)는 굽어 흐르는 원당천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발달된 하식애(河蝕崖)로, 서벽정 서쪽에 우뚝 솟은 기암은 배의 돛대모양을 하고 있어 절경이다.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 (茂朱 九千洞 一士臺 一圓)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 (茂朱 九千洞 一士臺 一圓)  

     

     

     

     

     

     

    송병선(宋秉璿)

    동의어 화옥(華玉) , 동방일사(東方一士), 연재(淵齋) 宋秉璿

     

     

    시대 근대
    유형 인물
    별칭 <자>화옥(華玉), <호>동방일사(東方一士), 연재(淵齋), <시호>문충(文忠)
    관련 사건 을사조약
    출생 1836년(헌종 2)
    사망 1905년 음력 12월 30일
    직업 학자, 국가유공자, 순국지사
    작품/저서 연재집, 근사속록, 패동연원록, 무계만집, 동감강목
    성별
    분야 역사/근대사
    본관 은진(恩津 :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1836(헌종 2)∼1905. 조선 말기의 학자·순국지사.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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