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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주 성산동 고분군 (星州 星山洞 古墳群)-사적 제86호
    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2. 12. 5. 08:55

    ( )-사적 제86호

     

     

    종목 사적 제86호
    명칭 성주 성산동 고분군 (星州 星山洞 古墳群)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고분군
    수량 721,590㎡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산61

    시대

    가야

    소유

    국유,사유

    관리

    성주군

     

    설명

    경상북도 성주군 성산일대에 있는 성산가야지배층의 무덤들이다. 성산의 정상에는 성산산성이 있고 주변에 70여기의 가야 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다.

    1호 무덤은 높이 3.6m, 지름 13.6m로 내부구조는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으로 보인다. 돌방(석실)에서는 은제관장식과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각종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2호 무덤은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으로 창·도끼·손칼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58호 무덤 굴방에서는 금제굵은고리귀고리(금제태환이식), 은제팔찌, 금동제말장식(행엽)이 발견되었다. 각 무덤에서 발견되는 굽다리접시(고배)의 굽에 생긴 구멍(투창)이나 1호 무덤에서 출토된 관장식이 경주지역의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58호 무덤의 유물은 전형적인 신라제품으로 5∼6세기경 성산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성산가야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당시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인접한 대가야와는 문화적으로 교류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성산가야(星山加耶)

    ‘벽진가야(碧珍加耶)’라고도 한다.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성산가야를 벽진가야라고 했는데, 이는 성주군 벽진면의 지명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성산이라는 지명은 현재 고령군의 한 면으로서 성산면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보아 지금의 성산은 고령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므로, 오해를 막기 위해 성산가야는 벽진가야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벽진(碧珍)의 ‘珍’은 옛 지명에 쓰인 ‘돌’·‘들’의 한자 표기이다. 그러므로 벽진가야는 ‘벽들가야’ 또는 ‘벼들가야’였을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성산가야를 “지금(고려 초)의 경산(京山)”이라고 하였다. 경산은 오늘날 성주군의 중심인 성주면에 있는데, 옛 지명인 경산부(京山府)가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벽진가야는 지금의 성주군을 중심으로 한 가야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성산군의 영현(領縣)에 본래 본피현(本彼縣)인 신안현(新安縣)이 있었는데, 신안현은 고려 초에 경산부라고 하였다. 경산부는 위와 같이 성주군 성주면이므로 현재의 행정 구획으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게이타이기(繼體紀)에 따르면, 반피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이라는 땅을 놓고 백제와 서로 빼앗으려 한 기사가 보인다. 이 반피국은 위의 본피현, 즉 지금의 성주군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성주 지역은 백제의 국경과 가까워 기문이라는 땅을 서로 빼앗으려 했다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기문은 지금 어느 위치에 있었던 땅인지 분명하지 않다. 532년과 562년에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각각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아 성산가야도 이 때를 전후해 신라에 합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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