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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세워진 함양 남계서원 (咸陽 灆溪書院)-사적 제499호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4. 5. 14. 19:05
두 번째로 세워진 함양 남계서원 (咸陽 灆溪書院)-사적 제499호
두 번째로 세워진 함양 남계서원 (咸陽 灆溪書院)
종목
사적 제499호 명칭
함양 남계서원 (咸陽 灆溪書院)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
4,810㎡ 지정일
2009.05.26 소재지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일원 (원평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사유,경상남도 함양군 설명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 전학후문에 배치를 하였다.
누문인 봉수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 옆으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두 번째로 세워진 함양 남계서원 (咸陽 灆溪書院)
어렵게 간 곳이었는데 뒤에 있는 제례공간인 사당을 깜빡......경판고도............
정여창(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지의(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복주(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 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강익( [정의] 1523(중종 18)∼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학자.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 함양효우촌(孝友村)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근우(謹友)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승사랑 응기(應麒)의 딸이다.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9년(명종 4) 진사가 된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66년 영남유생 33인의 소두(疏頭)가 되어 정여창(鄭汝昌)의 신원을 청하였다,1552년에 남계서원(藍溪書院)을 건립하여 정여창을 제향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후학을 지도함에 있어 극기와 신독(愼獨)을 권장하여 말보다는 실천위주의 학문을 하도록 하였다. 뒤에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개암집』 2권이 있다.정온(鄭溫) 1324년(충숙왕 11)∼1402년(태종 2).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자옥(子玉), 호는 우곡(隅谷).
조부는 진산부원군 정헌(鄭櫶)이요, 부친은 정승(政丞) 정석(鄭碩)이다.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고려 왕조 말기에 병이 나 청맹과니가 되었다고 칭탁(稱託)하고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번 불렀으나 청맹(靑盲)이라 핑계하고 끝내 나아가지 않자 중사(中使)를 보내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솔잎으로 눈을 찔렀지만 눈동자를 움찔하지 않았다. 이 일은 『여지지』에 실려 있다.
비록 가족이나 부자간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루는 혼자 앉아 있는데 좌우에 사람이 없었다. 닭이 와서 마당의 곡식을 쪼아먹자,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저, 저"라고 했다. 부인이 그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보이는 것이 있소?"라고 말하자, 그는, "소리를 듣고 알 뿐 무엇이 보이지는 않소."라고 말하였다.
묘소는 상사리(上寺里) 우곡(隅谷)에 있다.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향사되었고, 후에 장성 경현사(景賢詞)에 배향되었다.
포은(圃隱)의 죽음과 야은(冶隱)의 떠나간 것과 우곡(隅谷)의 청맹을 은나라 삼인(三仁)에 비유하였다.'문화재 > 내가 본 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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