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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서울 漢陽都城)-Hanyang City Wall, Seoul-사적 제10호문화재/내가 본 사적 2013. 9. 1. 21:46
서울 한양도성 (서울 漢陽都城)-사적 제10호
사적 제10호 사적 제10호
종목 사적 제10호 명칭 서울 한양도성 (서울 漢陽都城)- Hanyang City Wall, Seoul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 467,922.6㎡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서울특별시 설명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 광희문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 졌으며, 수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때 써 붙였다. 그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서문 위 여장은 파괴되었으며,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북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 서울성곽 → 서울 한양도성 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사적 제10호 사적 제10호 [포토] 한양도성 성곽길에서 만난 가을 (msn.com)
숭례문
소의문
역사
1396년 건설되어 광희문과 함께 일반적인 통행로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소덕문(昭德門)'이었지만, 1744년 영조 때 문을 개수하면서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쳤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처형장 중 한 곳이었는데 특히 1800년대 중반 이후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새남터 성지, 절두산 성지 등과 더불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특히 새남터 성지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 사제들이 다수 순교한 것과 달리,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평신도들이 주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에 천주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돼 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 한국을 찾았을 때 이곳을 참배하며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인근 충정로의 약현성당에 그 기념관이 있으며, 서소문 공원 내에는 순교성지가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소의문 지역에 도로와 경의선 철도를 낸다는 명분으로 소의문을 헐어버렸다.철거 이후
그렇게 1914년 헐려버린 이후 이 지역은 "서소문이 있었대" 정도의 구전만 남게 되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략 지금의 서소문 근린공원 주변 경찰청 앞 사거리(서소문고가차도)에서 서소문로를 따라 시청방향으로 한 블럭 더 들어간 샛길 분기점(고가차도 시점)이 소의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지역이다. 소의문의 이름은 서소문로라는 도로명주소와 서울소의초등학교라는 학교 이름으로 남았으며, 경의선에 서소문역과 서소문 건널목이 있었다는 것만 남아있다. 비슷한 예가 바로 돈의문 즉 서대문이다. 서대문도 마찬가지로 일제에 헐리고, 터를 알리는 알림석만 있다. 실제로 있는 터는 다 도로가 들어서 있다. 그나마 남은 것은 서대문구라는 지명과 그 지명에서 파생된 서울서대문경찰서, 서대문역, 서대문 형무소 뿐이다.
소의문 터에 있던 재활용쓰레기처리장과 공영주차장 부지를 재건해, 2019년 6월 1일에 서소문성지역사공원과 박물관이 개관했다. 설계는 인터커드 건축사사무소에서 맡았다. 2019년에는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돈의문
이름과 위치
'돈의문(敦義門)' 뜻은 '의(義)를 두텁게 하는(敦) 문(門)'이다. '의(義)' 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 돈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두텁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명(異名)은 '서대문(西大門)'이다.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란 뜻이다. 이때문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중구 정동 현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 건너편의 현재 행정구역인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다. 중구 서쪽 지역 및 종로구 서부 지역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 및 종로구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있었다. 동대문 및 동대문구와 유사한 경우이다.역사
1396년 한양의 2차 성곽공사를 마무리할 때 8개 성문을 지었는데, 돈의문도 이때 세워졌다. 당시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적으로 돈의문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돈의문이 폐쇄되었다.[6]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은 지역의 지맥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사람과 말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1413년 6월 19일태종은 대신할 문을 어디에 세울지 의정부에 명하여 찾게 했는데, 이때 태종의 대표적 권신 안성군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길을 따라서 문을 세우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이숙번은 상왕 정종이 기거하는 인덕궁 앞 작은 동네가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다른 의견을 내자 조정이 그대로 따라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 서전문은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4년(1422)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화기 정동에 들어선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새문'이라는 호칭이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문으로 사람이 통행하고 마소가 오가므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8]이라 부르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후에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숙종 37년(1711)에 다시 지었다. 이 당시 돈의문으로 어가가 지나다녔기 때문에 규모를 크게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남아있던 석축의 폭이 너무 좁고 수평이 안 맞는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며 정문인 흥인문, 숭례문과 격이 다르다는 등의 여러 사정으로 단층 문루로 짓게 된다.
시간은 흘러 일제강점기 1915년, 일제는 경성(서울)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하려 했는데, 돈의문이 방해가 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그렇게 조선 초부터 약 500년 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총독부 토목국 조사과에서는 돈의문의 경매입찰은 진행하였고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낙찰되었다.
ㅡ 1915년 3월 7일. 매일신보복원 시도
돈의문 가상 복원도숭례문과 흥인지문, 숙정문만이 남아있던 탓인지, 돈의문의 이명인 서대문은 각종 지명에 남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대문은 어디 있는지 관심도 없는 비운의 대문이 되었다.
복원에 대한 논의 끝에 서울특별시는 서대문고가도로를 철거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돈의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까지 서울 성곽도 복원될 예정이었으며, 그러면 복원된 숭례문과 함께 4대문과 성곽이 복원되는 셈이었다. 이는 돈의문 복원을 위한 자료수집 중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돈의문 현판을 발견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돈의문 외형 사진 몇 장, 현판 말고는 복원 근거 자료가 전무하다는 의견으로 복원이 불가능이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는 다르게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는 (2층 누각인 숭례문, 흥인지문과 달리) 단층 누각으로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교통체증, 교통문제, 예산문제, 토지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며, 복원한다면 서울적십자병원도 철거하고 이전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인근의 경희궁마저 2004년 이후 사실상 복원이 중단되었으므로 돈의문 복원은 끝내 불가능하게 되었다. 굳이 복원하려 한다면 혜화문의 사례 처럼 원래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돈의문을 복원하는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
한편 2018년 12월 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우미건설, 문화재청, 서울특별시, 제일기획이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돈의문의 증강현실 복원을 결정, MOU를 체결했다. 약 8개월 뒤인 2019년 8월 20일 증강현실 복원이 완료되어 터로 알려진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조형물을 설치하여 스마트폰의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돈의문을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강북삼성병원 아래 나무판을 짜맞춰 세운 담장이 있는데 옛 돈의문 자리임을 표시하기 위해 설치한 공공미술 작품 '보이지 않는 문'이다.그리고 2010년쯤엔 새문안길과 정동길이 만나는 사거리에 돈의문 터임을 알리는 하얀색 성돌 모양의 페인트를 도로에 칠했는데 도로를 재포장하면서 지워졌다.
2023년, 서울시가 장기적으로 돈의문의 실물복원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관리비로 매년 2-30억 원 가량이 투입되는 박원순 시장 시절에 건설한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철거하고 그 일대에 짓겠다는 추가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돈의문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터에 도로와 각종 건축물이 들어섰기 때문에, 교통 문제나 토지 보상 문제 등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라 복원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창의문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과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왕들이 경복궁에 들어갈 때 쓰는 문이다. 어느 한 승려가 선조에게 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마구 왕래하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자 창의문을 폐쇄해버렸다. 그러나 이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고 도성에 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후에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역사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로 1422년(세종 4년)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년) 4월에 닫혔다. 1469년(예종 1년)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
보존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남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 하여, 창의문 천장에는 지네의 천적인 닭을 닮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 평시에는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다만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하여 다시 개방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해 9월 3일 혜화문과 창의문을 그대로 닫아 두기로 한다는 것만이 나올 뿐이다.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하문이라는 별칭은 인왕산 자락의 계곡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 이름을 본따서 상명대학교에는 '자하관'이라는 강의동 건물이 있으며, 대학은 자하(紫霞)라는 이름의 교지를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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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숙정문
혜화문
흥인지문
광희문
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609003-001-V00017@N2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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