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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삼문의 묘 (成三問의 墓)-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
    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3. 8. 17. 14:34

    성삼문의묘 (成三問의墓)-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01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01호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01호

    명칭

    성삼문의묘 (成三問의墓)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수량

    1기/877㎡

    지정일

    1984.05.17

    소재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

    시대

     

    소유.관리

    창녕성씨종중,성하진

    설명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1418∼1456) 선생의 묘소이다. 아기를 낳으려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하고 3번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세종 20년(1438)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예기대문언독』을 펴내기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중국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13번이나 다녀오기도 해 한글 반포에 공로가 많았다.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을 잡으면서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의 3등 칭호를 사양하였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과 예조참의, 1455년 예방승지 등의 직책에 올랐다. 아버지인 성승,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미리 발각되어 한강가(지금의 서울 노량진)에서 끔찍한 처형을 받았다.

    그의 묘소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며,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쪽 다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 그믐에 선생의 위덕을 기리는 묘제 행사가 거행되며,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01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01호  

     

     

     

     

     

     

     

     

     

     

     

     

     

     

     

     

     

     

     

     

     

     

     

     

     

     

     

     

     

     

     

     

     

     성삼문(成三問)
    1418년(태종 18)∼1456년(세조 2) 6월 8일 
     
    세조실록 2년(1456) 6월 8일 기사에 "이개.하위지.성삼문.... 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할 것을 꾀하여, 6월 초1일에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 이개 등을 환열(轘裂)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함.
    . 조선 초기의 문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1. 가계와 관직
    증조부는 대제학(大提學) 성석용(成石瑢)이며, 조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달생(成達生)이고, 부친은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며, 모친은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딸은 부사 박임경(朴臨卿)의 아내가 되었는데, 외손 박증(朴增)은 은거, 박호(朴壕)는 문과급제 후 중종조에 호조판서를 지냈고, 박한(朴垾)은 별좌를 지냈다.

    1438년(세종 20)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에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곳에 유배중인 명나라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서 1446년 9월 2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에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2.인품과 학문

    그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또한, 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민족문화의 차원에서도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5번지]에도 있다. 장릉(莊陵: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유허(遺墟)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외가)와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한양말)(별장) 두 곳에 있다. 관직 생활하던 사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3번지 부근이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 『매죽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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