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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건신부생가지 (金大建神父生家址)-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8. 16. 12:38

    김대건신부생가지 (金大建神父生家址)-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

     
     
     

    종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

    명칭

    김대건신부생가지 (金大建神父生家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탄생지

    수량

    2,000㎡

    지정일

    1998.07.28

    소재지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15 및 116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대전교구천주교회,대전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설명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1822-1846) 신부가 태어난 곳으로, 국내 제1의 카톨릭 성지이기도 하다.

    김대건은 최초의 천주교 신부일 뿐아니라, 천주교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다. 충남 당진 출신으로 증조부가 10년간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순조 31년(1831) 신부 모방이 신학생으로 추천하여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로 가게 되었고 신부 리부아의 배려로 중등과정의 교육과 신학과정을 마친 뒤, 헌종 10년(1844) 부제가 되었다. 1845년 귀국하여 서울에 자리 잡은 뒤에는,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여 다시 상해로 가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전세계 카톨릭 교회의 공경의 대상이 됨에 따라, 그의 생가터인 이곳은 역사·종교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적지가 되었다.
     

     

     
     

    김대건신부생가지 (金大建神父生家址)

               

    김대건신부생가지 (金大建神父生家址)

     
    2014.09.26-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에서 사적 제529호로 새로 지정됨

     

     

     

     

     

     

     

     

     

     

     

     

     

     

     

     

     

     

     

     

     

     

     

     

     

     

     

     

     

     

     

     

     

     

     

     

     

     

     

     

     

     

     

     

     

     

     

     

     

     

     

     

     

     

     

      

     

     

     

     

     

     

     

     

     

     

     

     

     

     

     

     

     

     

     

     

     

     

     

     

    김대건( 1822(순조 22)∼1846(헌종 14). 천주교 신부.
    본관은 김해(金海). 세례명은 안드레아. 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 출신. 아버지는 제준(濟俊)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택현(澤鉉)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J.J.J.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M.N.A.)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할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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