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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사 (三忠祠)-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3. 8. 7. 00:21
삼충사 (三忠祠)-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명칭
삼충사 (三忠祠)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
1 동 지정일
1984.05.17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1 외 1필지 시대
기타 소유.관리
부여군 설명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성충( ?∼656(의자왕 16). 백제말의 충신.일명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 656년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결국 660년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泗沘)로 쳐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왕은 그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였다. 현재 부여에서는 그를 흥수(興首)·계백(階伯)과 함께 삼충사(三忠祠)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흥수( ) 생몰년 미상. 백제시대의 충신.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있다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으로 귀양갔다.660년(의자왕 20)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치려 하므로, 왕이 좌평의직(義直), 달솔(達率)상영(常永) 등의 신하를 모아 전쟁에 대비하려고 회의를 열었으나 의논이 구구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왕은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응하는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넓은 들판에 진을 치고 싸우면 승패를 알 수가 없다. 백강(白江 또는 伎伐浦)과 탄현(炭峴 또는 沈峴)은 우리 나라의 요새지이므로 마땅히 용사를 가려 보내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사졸(士卒)들이 피로해질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것이다.” 고 하였다.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가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당병은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이 때에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새장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 고 하니, 왕이 그럴싸하게 여겼다. 이 때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지금도 충청남도 부여에서는 백제 말기의 충신인 성충(成忠)·흥수·계백을 삼충사(三忠祠)에 제향하여 매년 가을철에 부여군민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계백( ?∼660(의자왕 20). 백제 말기의 장군.계백(堦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5만여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 : 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 오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황산(黃山 : 지금의 충청남도 連山)벌에 나가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 구천(越王句踐)은 5,000명으로 오왕 부차(吳王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해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해 세 진영으로 나뉘어 연합군에 대항하였다.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결사대 5,000명의 용맹은 연합군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연합군과의 네 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한편, 권근(權近)은 계백이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며, 계백의 그러한 행동은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해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그 평가는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 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문화재 > 내가 본 문화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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