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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陰城 權近 三代 墓所 및 神道碑)-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7. 19. 22:06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陰城 權近 三代 墓所 및 神道碑)-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종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 명칭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陰城 權近 三代 墓所 및 神道碑)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수량
일원 지정일
1980.01.09 소재지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안동권씨문충공파,권영수 설명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양촌(陽村) 권근(1352∼1409)과 선생의 아들 권제, 손자 권람의 3대묘이다.
선생은 공민왕 17년(1368) 성균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공민왕(재위 1352∼1374)이 죽자 정몽주·정도전과 함께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고 창왕 2년(1389)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에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대제학을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문장이 뛰어나『동국사략』등 조정의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권제(1387∼1445)는 권근의 둘째 아들로 우찬성의 벼슬에 올랐고『고려사』편찬에 참여 했으며『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권람(1416∼1465)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란 때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여러 차례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덕으로 좌의정의 벼슬까지 올랐다.
3기의 묘앞에 모두 각각 묘비,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고, 봉분은 모두 원형이다.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양촌(陽村) 권근(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그 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 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뒷 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했다.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지재(止齋) 권제(
처음에 음보(蔭補)로 경승부주부(敬承府注簿)에 기용되었으나 감찰 때 대사헌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었다. 1414년(태종 14) 친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헌납(右獻納)이 된 뒤 병조정랑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거쳐, 1416년 사예(司藝), 1418년에 사인(舍人)을 지냈다.1419년(세종 1)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사은사 경녕군 비(敬寧君裶 : 태종의 제1서자)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과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지냈다.1423년 집현전부제학이 된 뒤 예조판서·대사헌·함길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 해에는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30년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 경기도관찰사, 이듬 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1435년 이조판서, 143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계품사(計稟使) 혜령군(惠寧君)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그 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39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1442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인 신개(申槩)와 함께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다.1443년 좌참찬으로 전라도도관찰사가 되었고,1444년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이듬 해에는 우찬성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오랜 동안 문형(文衡 : 대제학의 다른 이름)을 역임했으며, 작품으로 「세년가(世年歌)」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소한당(所閑堂) 권람(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와 같았다.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試)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 歷代兵要≫의 음주(音註)를 편찬하는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그와 가까워졌다.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 대신들의 손에 들어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수양대군이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때,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게 접근해 집권을 모의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양정(楊汀)·홍달손(洪達孫)·유수(柳洙)·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 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4년 2월에 우부승지,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6월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9월에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3월에 역신(逆臣)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그해 7월에 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1457년 2월 난신(亂臣)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金文起)·장귀남(張貴南)·성승(成勝)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8월에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었다. 1458년 5월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하고,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했다.1459년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 5월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책임을 맡았다. 1464년 신병으로 감악산신(紺岳山神) 설인귀(薛仁貴)에 치성을 드릴 때, 비바람이 몰아치자 “당신(설인귀)과 나는 세력이 서로 같은데 어찌해 이와 같이 몰아치는가.” 하고 호통했다고 한다.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명신(名神)을 숭배해 사람들의 의아심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활을 잘 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고적을 떠돌아다녔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첩에 혹해 정처를 소박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세조를 도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으로 만년에는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남산 아래에 화려한 집을 소유하기도 했다.시문집으로 ≪소한당집 所閑堂集≫이 있고, 할아버지가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 應製詩註≫는 그의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 때 ≪동국통감≫의 편찬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문화재 > 내가 본 시도기념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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