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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7. 19. 20:08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

     
     

     

    종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명칭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

    일곽

    지정일

    1976.12.21

    소재지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

    시대

     

    소유.관리

    사유,배천조씨종중

    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重峰) 조헌(1544∼1592) 선생의 묘소이다.

    명종 22년(156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국가 정책에 있어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일본과의 친교정책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에 후율정사를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는데 앞장 섰으며,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7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자들이 700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하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하였으나 인조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

     

     

     

     

     

     

     

     

     

     

     

     

     

     

     

     

     

     

     

     

     

     

     

     

     

     

     

     

     

     

     

     

     

     

     

     

     

    시대 조선
    출생일 1544년(중종 39)
    사망일 1592년(선조 25)
    경력 공조좌랑, 보은현감
    유형 인물
    관련 사건 금산전투
    직업 문신, 유학자, 의병장
    성별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본관 배천(白川)

    요약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개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 출생. 조황(趙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세우(趙世佑)이고,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다.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영(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다. 그러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상훈과 추모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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