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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7. 14. 23:21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종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명칭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80.11.13

    소재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시대

     

    소유.관리

    법주사 주지

    설명

    법주사의 절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다.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한자 碧巖大師
    영어음역 Im Chun
    이칭/별칭 각성(覺性),징원(澄圓)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손경희

     

    김천에서 수도하다 입적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 후기의 고승이자 승병장.

    [가계]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어머니는 조씨(曺氏)이다.

    [활동 사항]

    벽암대사(碧岩大師)[1575~1660]는 10세에 출가하여 설묵(雪默)의 제자가 되었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후 불경을 공부하였다. 그 뒤 선수(善修)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의 명산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가야산에 있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은 “불도징(佛圖澄)과 도안(道安)을 해외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 뒤 스승과 함께 지리산으로 옮겨 ‘삼걸(三傑)’로 널리 알려졌던 충휘(冲徽), 태능(太能), 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선수가 광승(狂僧)에게 무고를 입어 투옥되자 벽암대사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해군이 직접 치죄하다가 그의 덕에 감복하여 하사품을 내리고 방면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부휴벽암을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다. 또한 광해군벽암대사를 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렸다. 1615년(광해군 7) 지리산 칠불암으로 옮겼고, 1616년 다시 신흥사(新興寺)로 옮겼으나 700명의 대중이 모여 오자 밤중에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은거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왕이 청계사(淸溪寺)에서 큰 재를 열었을 때 설법을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에 나라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하여 공을 치하하였다.

    1632년(인조 10)에는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옮겨가자 전국 사찰에 ‘총궐기하여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격문을 보냈다. 승군 3,000명이 모이자 이를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가는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640년(인조 18) 봄에 쌍계사(雙溪寺)를 중수하였고, 그해 8월에 호남관찰사 원두표(元斗杓)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인조 19) 해인사로 가서 머물 때 조정에서는 벽암대사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향하던 도중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백운산 상선암에 머물렀으며, 1642년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법석을 베풀었다. 이때 왕자의 신분이던 효종은 그를 만나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인조 24)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熙彦)과 은거하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자신도 화엄사로 가서 지내다가 제자들에게 ‘도업(道業)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한 뒤 입적하였다. 향년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사상과 저술]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초(守初)처능(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 백곡파(白谷派), 침허파(枕虛派), 고운파(孤雲派), 동림파(東林派), 연화파(蓮花派), 벽천파(碧川派) 등의 7파를 세워서 벽암대사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벽암대사는 수행에 통달하였고, 한국 불교의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이념의 전통성을 깊이 익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실천하였으며, 무자간화선(無字看話禪)을 크게 중요시하고 화엄 사상에도 해박하였다.

    특히 문도들을 가르칠 때 ‘참되고 깨끗하고 굳세게’라는 삼잠(三箴)으로 지침을 삼아 교육하였는데, 이것은 휴정(休靜)이 불교계의 장래를 염려하여 선수에게 부탁하였던 ‘기강의 재정돈’을 이어받아 구체적으로 이행한 것이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가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였다. 초서와 예서에도 능하였다.

    [묘소]

    부도가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에 있는 쌍계사지(雙溪寺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만년에 이곳에서 수도하다가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4

     

     

     비문은 대사의 제자 처능(處能)의 부탁으로 동부승지 정두경(鄭斗卿)이 지었고, 글씨는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썼으며,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는 대사의 용맹을 보여주는 일화, 스승 부휴(浮休)와 함께 왕에게 친국(親鞠)받았을 때의 일화, 인조 때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 되어 승도를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조한 일, 병자호란 때 삼천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관군과 함께 싸운 일, 왕자였던 효종을 만나 화엄(華嚴)을 논했던 일, 입적(入寂)할 때의 일화 및 대사의 인품에 대해 적혀 있다.
    선조의 손자 이우(

    1637(인조 15)∼1693(숙종 19). 조선 중기의 서화가. 

     

    자는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瀾亭). 선조의 열두 째 아들인 인흥군 영(仁興君瑛)의 큰아들로 낭성군(朗善君)에 봉해졌다.       
    1662년 7조(七朝)의 어필을 모사하여 간행하였고, 그 공으로 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되었다. 1663년 진위무진향정사(陳慰撫進香正使)로서 청나라에 갔다 뇌물로 4천금을 사통한 죄로 귀국한 뒤 삭직당하였다가 복권되었다.
    1671년과 1686년에 문안사(問安使)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글씨와 함께 묵란(墨蘭)·묵죽에 능했다 한다. 유작으로 글씨에는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등의 비액(碑額)이 전하는데 그림은 전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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