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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orld Cultural Heritage-파주 삼릉 (坡州 三陵)-공릉-사적 제205호-35
    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7. 10. 18:57

    World Cultural Heritage

    파주 삼릉 (坡州 三陵)-공릉-사적  제205호-35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8th King Yejong's wife Queen Jangsun-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제8대 예종(재위1468~1469)의 원비 장순왕후(1445~1461)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조 개창
    2대 정종개풍 후릉(厚陵) 이방과 1398~1400
    1357(공민왕 6)∼1419(세종 1). 조선의 제2대 왕.      
    재위 1398∼140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경(曔)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자는 광원(光遠)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월성부원군(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행실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해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다. 1389년(창왕 1) 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1390년 1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 해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격파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고, 이듬 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 책봉문제가 제기되었다. 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이 양보해 세자가 되었다.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따라 전개되었다.
    1399년(정종 1) 3월 개경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해 권귀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400년 2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 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 분리체제를 이뤘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해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그 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다. 11월에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해 노비 변정을 기도하였다.
    재위 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으로 삼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였다.      
    시호는 처음에는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었으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으로 개시되었다. 묘호(廟號)는 정종(定宗)이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여주 영릉(驪州 英陵)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1397(태조 6)∼1450(세종32). 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다.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효령(孝寧)·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擇賢 :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의 명분을 주어 그를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장릉(莊陵)단종비사릉(思陵) 이홍위 1452~1455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  
    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집현전직제학 양성지≪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으로1457년 6월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이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원비 장순왕후-파주삼릉-공릉 이황 1468~1469
    1450(세종 32)∼1469(예종 1). 조선 제8대 왕.      
    재위 1468∼146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황(晄)이다. 자는 명조(明照)이며, 초자(初字)는 평보(平甫)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파평부원군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章順王后)이다. 계비는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처음에는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19세에 수강궁(壽康宮)에서 즉위하였으며, 재위 1년 2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즉위 초에는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삼아, 이들이 서무를 의결하게 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였다. 이 해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 사형당하였다.
    1469년 3월 삼포(三浦)에서 왜(倭)와의 사무역을 금지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각 도, 각 읍에 있는 둔전(屯田)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해 6월에 「천하도(天下圖)」가 완성되었다. 7월에는 『무정보감(武定寶鑑)』이 이룩되었다. 9월에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예종은 세자로 있을 때인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치 경험이 있고 세조의 정치방법에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세조처럼 언관(言官)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여 언관에 대한 좌천·파직 등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재위기간이 약 14개월에 불과하여 이 시기는 세조시대에서 성종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시대의 성격을 띤다. 시호는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다. 묘호는 예종(睿宗)이다. 능호는 창릉(昌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       
    재위 1494∼150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융(㦕). 성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관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혹은 尹起畝)의 딸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그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선원계보 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그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 : 단근질하기)·착흉(斮胸 : 가슴 빠개기)·촌참(寸斬 : 토막토막 자르기)·쇄골표풍(碎骨瓢風 :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庫)의 수리, 중국에 대한 현명한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조금도 없었다.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든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 ≪국조보감 國朝寶鑑≫·≪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 질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5∼6년 동안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지만, 여기에는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였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된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 때 그렇게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데는,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해 그들의 정쟁에 이용한 점도 있었다.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다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훈구 재상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했고, 이에 또 한 번 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화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되겠지만, 이 역시 그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사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당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당해 죽었다. 그 밖에 윤필상(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한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은 사실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계와 연산군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 버렸다. 정언을 하는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다. 그 밖에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으로 생각되던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이 곳에 ‘연사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석물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172
    11대 중종중종의 계비고양 서삼릉 희릉 이역 1506~1544
    1488(성종 19)∼1544(중종 39). 조선 제11대 왕.      
    재위 1506∼154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역(懌)이다.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윤씨(尹氏)이다.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년 9월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1519년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해 나라를 뒤집어놓았다고 주장해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정국 불안은 국방정책에도 많은 혼란을 가져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1510년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다.1522년 5월 추자도(楸子島) 왜변과 동래염장(東萊鹽場)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 왜변이 대표적이다.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해 인마(人馬)를 약탈하였다. 이에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
     1512년는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야인들이 침입해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고,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였다. 향약을 전국에 설치하였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이륜행실 二倫行實≫·≪속삼강행실 續三綱行實≫ 등을 간행해 국민 교화에 힘썼다. 중종 말년에는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고 ≪경국대전≫·≪대전속록≫ 등을 간행하였다. 1540년에는 역대의 실록을 등사해 사고(史庫)에 배치하였다. 
     1522년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했다. 
    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해 이두석(泥豆錫)·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배워 오게 하였다. 1536년에는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해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였다. 시호는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는 중종(中宗)이다. 능호는 정릉(靖陵)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
     
    12대 인종서삼릉-효릉(孝陵) 이호 1544~1545
    1515(중종 10)∼1545(인종 1). 조선 제12대 왕.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호(岵)이다. 자는 천윤(天胤)이다.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다. 25년 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1544년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로 파방된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기묘명현을 신원해 주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학문을 사랑하여 3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1522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해,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 병을 얻었다. 서형(庶兄)인 복성군 미(福城君嵋)가 그의 어머니인 박빈(朴嬪)의 교만으로 인해 귀양 가게 되었을 때, 이를 석방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중종도 그의 우애 깊음에 감복해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고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할 때는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고, 손수 잠자리를 살폈다.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1545년(인종 1) 인종은 병환이 위독해지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明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경복궁 정침(正寢)에서 31세로 죽었다. 시호는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묘호(廟號)는 인종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172 
    13 명종 이환 1545~1567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 왕과 문정왕후에게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이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 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

     

     
    19대 숙종 이순 1674~1720
    1661(현종 2)∼1720(숙종 46). 조선 제19대 왕.       
    재위 1674∼172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비(妃)는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이며, 제2계비는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己巳換局)(甲戌換局) 연속적인 변화가 있었다.노론·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 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춰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났다.대동법(大同法)을 완성하였다.양전사업(量田事業)을 사실상 종결하였다.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하였다.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다.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왕권 강화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붕당정치 하에 견제 받고 손상되었던 왕권의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양역변통 문제에 대한 해결 시도에서 나타나듯 민생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민폐의 제거와 민생 안정책의 시행에 주력하였다.      
    전체적인 면에서, 임진왜란 이후 동요된 사회에 대한 수습과 재정비 과정을 일단 마무리지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서오릉(西五陵)에 있다.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영조의 원비릉-서오릉 홍릉 이금 1724~1776
    1694(숙종 20)∼1776(영조 52).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5∼1776. 성은 이씨. 이름은 금(衿),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그를 보좌하는 동궁요속(東宮僚屬)이던 김동필(金東弼)·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박문수(朴文秀)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세제의 자리를 지켜 1724년 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均役法)이었다. 단순한 감필(減疋)이 아니라 모두 1필역(一疋役)으로 부담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그리고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結錢)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이 위주인 지주층의 부담을 끌어내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피역자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한 것이나, 어염세·은여결세 등 그 동안 국가세입에 들지 않던 세금을 국고로 환수하게 한 데서 보듯이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가 얽힌 양역문제 해결에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한 것은, 1750년 친히 홍화문(弘化門)에 나가서 한성 시민을 만나서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의지를 보인 것과 함께 균역법이 갖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1733년에는 평양중성(平壤中城)을 구축하게 하며,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1770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서삼릉-예릉 이원범 1849~1863
    1831(순조 31)∼1863(철종 14). 조선 제25대 왕.      
    재위 1849∼1863.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변(昪)이다. 초명은 원범(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전계대원군 광(全溪大院君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 純祖妃,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하였다. 이듬 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 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다. 또 그 해 여름에 한재가 심한데도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 : 욕심이 많고 비리를 저지름.)의 징벌을 엄명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여주의 민가 약 1,000호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 주어 구활하게 하였다. 또한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다. 이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는 등 빈민구호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 : 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해,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에게는 그 방책을 강구해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에 얽매여 제대로 정치를 펴 나갈 수 없었다.
    이런 사회현상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을 창도해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하였다. 교주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였다.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수용(睟容 : 임금의 畵像)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묘호는 철종(哲宗)이다.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26대 고종홍릉(洪陵) 이희(이명복) 1863~1907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 왕.      
    재위 1863∼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852년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그러나 고종은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으로 국정을 총람, 대신 섭정하게 하였다. 그 뒤 고종은 장성하게 되면서 직접 통치를 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지게 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다스린다는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권한을 환수하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였다.
    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등의 항구를 개항하여 개화 문명을 수용하였다.
    일본 공사(日本公使 : 三浦梧樓)는 친일 정객과 모의하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하였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하고, 비로소 홍릉(洪陵)에 국장되었다(1919년 金谷陵으로 옮김).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군사적 압력 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1차 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저서로는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능은 홍릉(洪陵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이다.
    27대 순종유릉(裕陵) 이청 1907~1910
    1874(고종 11)∼1926. 조선 제27대 왕.      
    재위 1907~1910.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74년 2월 창덕궁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탄생 다음 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에 민씨(뒷날의 純明孝皇后)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새로이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다.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송병준(宋秉唆)·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매국정객과 일본의 야합으로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는 경국(傾國)의 비사(悲史)와 민족사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저항의 통사(痛史)의 시기였다.한국 군대를 재정 부족이라는 구실로 강제해산시켜 우리 겨레의 손에서 총·칼의 자위조직마저 해체해 버렸다. 또한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 버렸다.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켰다. 침략의도에 부화뇌동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송병준·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조선인의 원(願)에 의하여 조선을 합병한다는 미명 하에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었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4월 25일에 승하하였다.       6월에 국장을 치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해 6·10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추존왕 덕종   이 장 1438(세종 20)∼1457(세조 3)  
    1438(세종 20)∼1457(세조 3). 조선 전기의 종실.  
    초명은 숭(崇), 이름은 장(暲).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명(原明). 아버지가 세조이며, 어머니는 참판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성종의 아버지이다.      
    1445년(세종 27)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1455년(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를 비로 맞아 월산대군(月山大君)성종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읽기를 즐겼으며 해서(楷書)에도 능하였으나, 병약하였다고 한다.
    1457년 병이 크게 들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慶會樓)에 공작재(孔雀齋)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의정부 당상관, 육조판서와 좌찬성 신숙주(申叔舟), 도승지 한명회(韓明澮) 등도 함께 참여하여 속한 쾌유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은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에 있다. 1471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의경(懿敬)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857

     

     

     

      사적 제205호             사적 제205호  
     


    종목 사적 제205호
    명칭 파주 삼릉 (坡州 三陵)-공릉-사적205호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323,105㎡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봉일천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파주삼릉관리소
    설명 파주삼릉에는 공릉(장순왕후)과 순릉(공혜왕후), 영릉(효장세자와 효순왕후)이 군락으로 모여 있다.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1445∼1461)의 무덤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1460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죽었다. 처음에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 무덤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은 없다. 다만 양석과 둘레돌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문인석의 옷주름 등이 조선초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서툴게 만들어졌다. 공릉은 1층, 2층의 구분이 없으며, 무덤 아래에 있는 붉은 문에서 무덤에 이르는 길을 참도라 하는데 원래는 직선으로 만들어진 것이 일반적인 예이나 이 무덤은 지형조건에 의해서 중간지역에서 꺾였다. 중간지역이 꺾인 참도는 조선왕릉 중 공릉뿐이다.

    순릉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1456∼1474)의 무덤으로 공혜왕후는 왕비로 봉해진 후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 밑둘레에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양석, 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 서 있다. 난간석에 표현된 작은 기둥은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은 것으로 조선 초기 무덤에 쓰인 석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릉은 죽은 후에 왕으로 봉해진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와 부인인 효순왕후(1715∼1751)의 무덤이다. 왕릉과 비릉은 쌍릉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은 세우지 않았으나, 석상을 앞에 두었다. 장명등은 중간에 배치하였으며 무덤 밑둘레에 양석과 호석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무덤 아래의 정자각은 영조의 명에 의해서 옛날 방식으로 세웠다.
     
     
      사적 제205호             사적 제205호  

      파주 삼릉 (坡州 三陵)-공릉-사적  제205호 조선의제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파주 삼릉 (坡州 三陵)-공릉-사적  제205호    

    https://youtu.be/T_kGG5kI0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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