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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간정 (玉磵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6. 25. 16:38
옥간정 (玉磵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
옥간정 (玉磵亭) 옥간정 (玉磵亭)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 명칭
옥간정 (玉磵亭)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
1 동 지정일
1992.07.18 소재지
경북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439-3 시대
소유.관리
정극, 정철검 설명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인 정만양·규양 형제가 제자를 육성하기 위하여 숙종 42년(1716)에 세운 정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영의정 조현명을 비롯하여 정중기·정간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권했으나 거절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앞면 3칸·옆면 4칸반 규모의 ㄱ자형 누각건물로 창호구성방법 등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옥간정 (玉磵亭) 옥간정 (玉磵亭) 정만양 [정의] 1664년(현종 5)∼1730년(영조 6). 조선 후기의 학자.경상북도 영천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기암(企菴)·정재(定齋).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동생 규양(葵陽)과 함께 수학하였다.1724년(경종 4)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동생 규양을 의병장으로 삼고 규율을 모두 갖추었으나,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이후 이남산(尼南山) 밑에 옥간정(玉磵亭)·육유재(六有齋)·태고와(太古窩: 후에 모고헌(慕古軒)으로 개칭)·진수재(進修齋) 등을 지어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또한 향음주례(鄕飮酒禮: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와 투호(投壺: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유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그는 동생 규양과 함께 경사(經史)에서부터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에 관한 토론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이는 허무공적(虛無空寂)이 아닌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요, 기는 칠정(七情)에서 나뉘어 용(用)이 수반되는 기질성(氣質性)으로 분리하니, 이는 곧 주(主)요, 기는 곧 자(資)라 정의하였다.동생 규양과 함께 「곤지록(困知錄)」·「이기집설(理氣輯說)」·「가례차의(家禮箚疑))·「개장비요(改葬備要)」·「의례통고(疑禮通攷)」·「상지록(尙知錄)」·「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계몽해의(啓蒙解疑)」·「외국지(外國誌)」·「산거일기(山居日記)」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훈(塤)과 지(篪)는 피리에 속하는 악기 이름으로, 형은 훈을 불고 아우는 지를 불어 서로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에서 동생 규양과 함께 「훈지악보(塤篪樂譜)」를 지었다.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순수하며 진실하였고, 글씨에도 능해 전서(篆書)를 잘 썼다. 저서로는 『훈지문집』이 있다.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정규양
1667(현종 8)∼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학자.본관은 오천(烏川, 迎日).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篪叟). 영천 출신.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형 만양(萬陽)과 함께 수학하였다.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정치·경제·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두루 정통하였다. 당시 사림들이 이들 형제를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 문하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유하였다.퇴계학에 전념하면서도 이형상(李衡祥)·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 등과도 학술 토론을 전개했고, 학파를 초월해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1714년(숙종 40) 학행으로 천거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형 만양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 명을 모아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그 뒤 이남산(尼南山) 밑에 육유재(六有齋)·진수재(進修齋)·옥간정(玉磵亭)·태고와(太古窩, 慕古軒)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한편, 향음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정)와 투호(投壺 :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유희)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주(主)요, 기(氣)는 자(資)라 정의해 형 만양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형 만양과 함께 「훈지악보(塤篪樂譜)」를 지었다.모든 저술을 대부분 형제가 같이 해 『심경질의(心經質疑)』·『치도의설(治道擬說)』·『의례통고(疑禮通攷)』·『개장비요(改葬備要)』·『경학연원도(敬學淵源圖)』·『상의치심단(上醫治心丹)』·『선천심법도(先天心法圖)』·『대학차록(大學箚錄)』 등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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