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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만덕사지 釜山 萬德寺址 시도기념물 제 3호
이 절터는 웅장한 석축과 당간지주(幢竿支柱)의 위치로 보아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동아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신라시대 회청색격자문(格子紋)토기조각, 고려시대의 회청색 무문(無紋)토기조각 등 12가지 유물이 수습되었고, 1990년, 1996년, 2001년 부산박물관에서 실시한 세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범어사 대웅전의 4배에 달하는 금당지(金堂址)와 경주 황룡사지, 기림사지와 맞먹는 대형치미, 봉황머리모양의 잡상이 출토되어 국찰급의 대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기비사(祈毗寺)라 새겨진 기와 9점과 장흥고(長興庫)라는 글이 있는 분청사기가 출토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덕사가 언제 세워졌으며 또 언제쯤 없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향완(1178년 제작)에 ‘기비사 주지 삼중대사가 이 향완을 금산사 주지에게 드린다'는 글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는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의 서자 석기(釋器)왕자가 출가했다는 만덕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첫 건립부터 폐사될 때까지 여러 차례 증·개축된 것으로 보아 절터의 성격과 전체 규모 등은 면밀한 조사와 고증를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