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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사 (木浦詩社)-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4. 13. 14:04
목포시사 (木浦詩社)-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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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 명칭
목포시사 (木浦詩社)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
317
지정일
1976.09.30 소재지
전남 목포시 죽교동 330-3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목포시사협회 설명
시사는 서로 뜻이 통하는 문학에 뛰어난 선비들이 계절에 따라 자연과 시를 융화시켰던 풍류의 장소이다. 목포시사는 한말의 대학자인 정만조가 1907년에 세운 건물로 전국 각처에서 200여명이 해마다 봄, 가을 2회에 걸쳐 백일장을 개최하여 한시(漢詩)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유래 깊은 시사이다.
정만조는 고종 26년(1889)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승지를 거쳐 내부참의, 규장각부제학 등을 지냈다. 광무년간 정변시 진도에 유배되어 10여년 간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 문학, 서예 등을 가르쳐 많은 인사를 배출하였고, 목포시사를 세워 퇴폐한 학문의 기풍을 바로잡아 지방 문화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시사 안에는 정만조의 문집을 비롯하여 한말의 전적, 한시 현판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목포시사 (木浦詩社) 목포시사 (木浦詩社) 목포시사 (木浦詩社) 목포시사 (木浦詩社) 목포시사 (木浦詩社) 정만조 [鄭萬朝]
1858(철종9)~1936.한말·일제강점기의 학자.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 아버지는 기우(基雨)이다. 강위(姜瑋)의 문인이다. 1883년(고종 20)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主事)가 되고, 1889년 알성문과에 급제해 예조참의·승지·내부참의·궁내부참의관 등을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관련되었다 하여 15년 유형(流刑)을 받고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 내린 사면령으로 풀려났다. 규장각부제학으로 서용되어 헌종·철종 때의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위원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뒤 이왕직전사관(李王職典祀官)·중추원촉탁 등을 지냈다. 1920년 친일 유림기관인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를 설립했다. 1922~25년 조선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27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된 뒤에도 위원이 되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강사가 되었으며, 1929년 친일유림으로서 처음으로 경학원대제학이 되어 일제 식민지 정책에 협조했다. 민족주의자인 김창숙(金昌淑)과 같은 유림들이 경학원에 발을 끊자 그는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총독부의 요구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여 총재를 겸임했다. 이왕가(李王家) 실록편찬위원이 되어 〈고종실록〉·〈순종실록〉의 편찬에 감수위원으로 참여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 〈무정전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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