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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전라남도 기념물 제50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4. 10. 19:16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전라남도 기념물 제50호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종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50호 명칭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81.10.20 소재지
전남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294-2 시대
소유.관리
사유,김상옥외5명 설명
유허비는 옛 선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무신인 김완 장군을 기리고 있다.
김완(1577∼1635) 장군은 영암 출신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당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방어사 진중으로 가던 중 왜적을 만나 21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이를 기념하고자 고종 24년(1887) 그 후손들과 이곳 주민들이 함께 비를 건립하였다. 1981년 지금의 자리로 비를 옮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김완장군전승유허비 (金完將軍戰勝遺墟碑) 김완 장군은 1577년 (宣祖 10년) 8월 23일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 899번지에서 학천군(鶴川君) 휘(諱) 극조와 모부인(母夫人) 천안전씨(天安全氏)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전 부인이 맹호(猛虎)가 품속으로 들어오고, 영암만 바닷물이 그의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상서러운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출생하였을 때에는 흰 기운이 방안에 가득하였다가 하루가 지난 후에야 흩어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들 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여력이 다른 사람과 달리 출중하여 크나큰 솥도 쉽게 드는 힘이 있었다. 또한 재주와 지략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도 뛰어 났다고 한다.김완 장군의 나이 21세 때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김완(1577∼1635) 장군은 영암 출신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당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방어사 진중으로 가던 중 왜적을 만나 21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남원(南原)의 진사(進士) 조경남(趙慶南), 정사달(丁士達)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금의 산동면 원촌 뜰에서 왜병과 싸움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1615년 관관무제시예(冠觀武才試藝)에 장원 급제 후 고산진 첨사, 전라우수군 병마절도사를 걸쳐 평안도 방어사로 있던 중 이괄의 난을 당해 이를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가의대부 학성군(鶴城君)으로 책봉됨과 동시에 금궤철권 및 영정을 하사받았다.
또한 1634년 훈련원 도정, 황해도 병사 겸 황주 목사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듬해 장군 나이 59세이던 1635년 2월 2일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에서 서거하였다. 사후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대 되었으며, 영조 24년(1748)에 양무공(襄武公) 이란 시호(諡號)와 함께 부조묘의 명을 받았다.'문화재 > 내가 본 시도기념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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