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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글과 글씨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국보 제47호문화재/내가 본 국보 2013. 4. 8. 00:1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국보 제47호
종목
국보 제47호 명칭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쌍계사 (운수리) 시대
통일신라 소유.관리
쌍계사 설명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국보 제47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라고도 한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雲水里) 쌍계사에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이다. 진감선사는 속성이 최씨(崔氏)이며 전주 금마(金馬) 사람으로서, 804년(애장왕 5) 당(唐)에 들어가 창주(滄州)의 신감선사(神鑑禪師)에게 득도한 후 830년(흥덕왕 5) 귀국했다. 진감선사의 법맥(法脈)은 구산선문(九山禪門)과 같은 독자적인 문호로 발전하지 못했으나, 우리나라 선종(禪宗)의 세력을 크게 부식(扶植)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 비는 887년(정강왕 2)에 완성되었으며, 사비(四碑)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비문의 글씨는 최치원의 친필이며, 사비 가운데 가장 짧은 2,500여 자이다. 비문은 서(序)와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의 첫부분에서는 유(儒)·불(佛)·노(老) 삼교사상(三敎思想)의 근원을 파고 들면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다음에 진감선사의 생애와 경행(景行:밝은 행동)을 간단하게 서술했으며, 끝부분에서는 비문을 짓게 된 경위와 자신의 심경을 적었다. 이중 특히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夫道不遠人人無異國)라고 시작되는 첫부분은 최치원의 3교사상에 대한 결론으로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비문은 우리나라의 불교사·불교사상사·선종사(禪宗史) 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쌍계사의 유래 및 불교음악인 범패(梵唄)가 언제 이 땅에 들어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어, 사찰의 역사와 국악사(國樂史)를 연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사산비명 [四山碑銘]
1.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2.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3.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4.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등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이 그것이다. 그중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찬(撰)뿐만 아니라 서(書)와 전액(篆額)을 아울러 했다. 숭복사지비는 인몰(湮沒)해 전모를 알 수 없다가 1931년 경주 동면(東面)에서 잔석(殘石)이 나와 그 편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문의 문체는 4·6 대우(對偶)와 6·6 대우가 주류를 이룬 전형적인 변려체(騈儷體)이다. 특히 문장 밖에서 사실을 끌어와 뜻을 증명하고 옛것을 빌려 현재의 뜻을 증명하려는 용전(用典)이 많으면서도, 대우구(對偶句)를 만들 때 필요한 고사(故事)나 고언(故言)을 잘라 모으는 전절(剪截)과, 발췌한 고사성어를 개역(改譯)해 자신의 글 내용에 부합하도록 하는 융화(融化)의 방법을 잘 구사해 화려한 어사(語辭)의 수식과 함축미·전아미를 보여준다. 즉 불교를 상당히 이해하고 특히 선종에 공감하는 입장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런 사상적 내용보다는 문장 수식에 더욱 깊이 유의했음을 알 수 있다. '사산비명'은 광해군 전후에 철면(鐵面)노인이라는 사람이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 孤雲集〉 중에서 뽑아내어 이름붙인 것이다. 불교학인들에게 송습(誦習)되면서부터 그 과외독본을 이루게 되었고, 순조와 헌종 때에 홍경모(洪景謨)가 주해를 더해 유행하게 되었다. 석전노사(石顚老師)는 다시 정주본(精註本)을 만들었는데, 이외에도 여러 주해본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사산비명'은 최치원 문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상사와 한문학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夫道不遠人人無異國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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