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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대통령 생가
    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23. 11. 22. 16:30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직선제 및 민간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제5대 민의원을 거쳐 제6·7·8·13·14대 국회의원(6선 의원)을 지냈으며 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대통령 재임중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노르웨이 라프토(Rafto) 인권상, 1998년 무궁화 대훈장,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9년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8],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미국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연설에 능하였으며,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북 증서를 받았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風霜)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로 비유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학력

    비학위 수료

    명예 박사 학위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운식에게는 본처가 따로 있었으며, 즉 김대중은 서자였다.

    아버지 김운식은 본부인 김순례에게서 1남 3녀를, 어머니 장수금과는 3남 1녀를 두었다. 아버지 집이 있던 대리마을과 어머니 집이 있던 후광리를 오가며 자랐다. 훗날에 김대중의 호인 후광은 그의 고향 마을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750년경 8대조 김광성이 신안 하의도 대리마을에 입도해 정착했다. 증조부는 헌종 때 한성부 좌윤을 지낸 김태현이며, 조부는 오위장을 지낸 김제호다. 아버지 김운식은 하의도 마을 이장을 맡기도 했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수금은 원래 제갈성조에게 시집갔으나 사별하고, 다시 윤창언의 첩이 되었으나 역시 사별했다. 이후 주막을 하다가 김운식의 첩이 되었고, 1960년에 김운식이 본처 김순례와 이혼하고 그녀를 본처로 삼았다.

    그가 태어날 당시 하의도는 인구 1만 명 이내의 섬으로 대한제국 시기의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시집 갈때 이 섬을 일본 제국에 팔아넘기는 바람에 섬 전체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가 되면서 주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18]

    아버지 김운식은 조선인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본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 했다. 장덕수가 잠시 피신하러 하의도로 내려왔다가 김운식과 가깝게 친교가 있었으며 장덕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다. 김대중은 "내가 태어난 이러한 토양이 민족과 같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라고 추억하곤 하였다.

    한편 김대중의 출생에 대하여 의혹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 장노도(張盧島(또는 장치도(張齒島)-후에 장수금(張守錦)으로 개명)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諸葛成祚)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친부라는 설, 두 번째 남편인 뻐리섬의 윤창언(尹昌彦)이 친부라는 설이 있다. 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인 장명우가 발행한 호적등본에 의하면 김대중은 7살 때 윤창언(尹昌彦)의 서자 윤대만(尹大萬)에서 김운식의 서자 김대중(金大仲)으로 개명 등재되어 있다. 이 때 개명한 김대중의 한자명 金大仲이 오늘날의 金大中으로 개명된 시점은 밝혀진 바가 없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랑 같이 놀던 어린 김대중이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자던 엿장수의 짐보따리에서 담뱃대를 훔쳤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 분노한 어머니가 김대중의 종아리를 걷은 뒤, 종아리 체벌을 한 적이 있었다. 먼 훗날 김대중은 그때 어머니로부터 옳고 그름, 선악에 대한 구별을 은연중에 배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김대중은 덕봉강당이라는 서당에서 초암 김연에게 수학하였다.

    마을 이장이었던 아버지에게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무료로 배달됐는데 그는 8살 때부터 꼭 신문의 1면과 정치면을 주의 깊게 읽었다.

    김대중은 1935년 4월, 4년제 하의보통학교(현재의 하의초등학교)에 2학년에 편입하여, 1938년 4월, 하의도에서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현재의 목포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차라리 모두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후 아무리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소학교 졸업을 할 때에는 수석으로 졸업하여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결국 뒤이어 5년제(중.고등학제)인 전라남도 목포 소재 목포공립상업학교(현재의 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김대중은 아무리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아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고교 시절(목포공립상업학교)의 학적부에는 김대중에 대하여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탓인지 훗날 그는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학원에서 정치적 동지인 김상현과 만나게 된다. 그의 한 동창생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교관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유럽 정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교관은 답변을 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 3학년부터 학교 측의 정책으로 취직반과 진학반이 나뉘었는데, 은행 취업을 목표로 취직반에 들어갔으나 이내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취직반 반장을 그만두고 진학반으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김대중은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4학년이 되면서 독서로 인해 넓어진 견문 탓에 반일 사상이 생겨나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전 과목에 걸쳐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반일 작문이 문제가 됐다. 일본의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미국 해군의 해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여행 허가가 어려웠고 이에 학비가 무료인 만주국 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진학해봐야 일본군에 징집이 될 것이 뻔하다는 2가지 이유에서였다. 15세가 되던 1938년 도요타 다이주(일본어: 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상업학교 시절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

    청년사업가 시절

    1943년의 김대중.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목포공립상업학교(현재의 목상고등학교)를 1944년 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1945년 해방이 되자 김대중은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어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인 임영춘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하는 한편 목포청년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이름하에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 1946년 2월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

    해방과 한국 전쟁 전후

    해방 직후의 김대중은 건준 목포지부에 이어 9월 경에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도 가입했지만 건준에 관련된 일을 주로 했으므로 청년동맹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 해 하반기에 동생 김대의와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가 미 군정 경찰에 의해 포고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석방된다. 같은 해에 차용애와 만나 결혼하였다. 1946년 초에는 공산 계열 정당인 조선신민당 전남도 목포지역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을 추종하는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면서 여름에 탈당하고 말았다.

    김대중은 이 무렵 회사의 관리 문제로 서울에 올라가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을 방문하여 회사관리권이 서울 거주 강 모씨에게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강씨를 만나 모든 선원을 그대로 고용하겠다는 안을 제시받았다. 회사로 돌아온 김대중은 이 방안을 놓고 사원들과 협의했으나 좌익동맹에 가입한 선원들이 반대하고 자치를 주장하면서 1946년 말 더 이상 회사 경영위원회에 관여하지 않고 회사를 떠난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전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난다. 10월 31일에는 목포에서도 파출소 습격사건이 발생하는데, 김대중은 밀고자에 의해 이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20일간 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당시 한민당 전남도 목포지역지구당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장인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 후 훈계 방면되었다. 파출소 습격사건이 혐의가 없다는 김대중의 해명과는 달리 1980년대 무렵 안기부가 작성한 김대중 조사 기록에 의하면 김대중은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의 지위로 배후 조종한 혐의를 받고 10일간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도중 한민당 당무위원 겸 동당 전남도 목포지역지구당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 관련 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훈계 방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해방 후 좌익에서 전향한 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던 보도연맹에도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7년,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전남도 목포지부에 당무위원으로 입당하여 목포지역지구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김대중은 한민당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앞서 일했던 선박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안을 운행하는 화물선 동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해운업을 시작한다. 1948년 10월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1949년 2월 경엔 하의보통학교 동창인 유재식(兪在埴)의 형이 동양해운 사무실로 찾아와 서울행 여비의 보조를 부탁하여 그의 상경 여비를 도와주었는데, 유재식은 남로당 섭외부원 출신으로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이었다. 이에 김대중은 유재식에 대한 자금제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친구의 형에 대한 단순한 여비 보조라는 점이 밝혀졌고, 또 해군 목포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의 신원보증으로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한국 전쟁 전후 시기 김대중의 행적에 대해선 김대중 본인이 술회한 기록과 1987년 작성된 안기부 문건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김대중의 자서전에 의하면 1949년에 조직된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에 부단장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때 해운 사업도 번창했다고 서술한 바 있는데, 전국 양곡 연안수송을 일괄 계약하고 있던 서울 소재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구 수송을 전담하는 하청 계약이 성사된 덕분이라고 한다.

    1950년 6월 15일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김대중은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 수송 운임을 수령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한국 전쟁을 마주했다고 한다. 김대중은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여관에 머물면서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으며 전라남도 목포까지 차라리 도보로 걸어서 내려왔지만 대한청년단 소속이 결국 문제가 되어 3일만에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인민위원회 소속 경찰에 연행된 김대중은 강당에서 처형만을 앞두고 있었지만 당시 목포에 주둔하던 인민군이 국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철수하는 그 바람에 가까스로 처형은 면했으나 이내 목포에 거류하던 공산당원에 의해 투옥되고 만다. 같이 투옥되어 있던 사람들을 부추겨 탈옥에 성공한 김대중은 그곳에서 극적으로 장인과 동생 김대의와 재회했으며 집으로 돌아가 천정에 은둔하며 지낸다. 연말이 되자 국군 보조기관이었던 전남지구 목포해상방위대에 자진 입대,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자신이 경영하던 해운회사 소속 선박을 동원해 인민군 게릴라 소탕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안기부 문건의 기록에 의하면 1950년 6월 27일 한국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에 체포되어 미국 육군특무부대 CIC에 의해 아군 후퇴시 사살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목포상고 선배인 김진하의 호명 착오로 구명되었다고 한다. 목포인민위원회 창설 활동, 부채 및 체불된 노임 횡령 혐의로 목포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9.28 수복시 탈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6월 27일엔 한반도에 군사고문단 이외 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6월 30일 한.미해군은 북위 37도 이북의 해상은 유엔해군이, 그 이남은 한국 해군이 담당키로 합의했으므로 미해군은 당시 서남해상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전쟁 발발 3일만에 미군이 함정에서 좌익이라는 혐의만으로 타국민을 사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주한미대사관은 이를 공식부인했다.

    안기부의 내부 문건이라 알려진 이 문건은 1987년에 작성된 문건으로 1987년 당시 안기부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여러 대책 문건과 "상록사업"이라는 이름의 정치 공작을 시행 중이었다. 그 내용 중에는 흑색선전을 비롯한 각종 관권 선거 관련자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당시 안기부에서 조직적으로 과거 김대중 관련 자료들을 파기, 분소했다는 정황증거가 알려져 있어 그 이후 공개된 위 문건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안기부가 작성한 위의 문서에는 김대중을 "광주 사태의 배후 조종자", "북한 연방제 추종자" 등으로 묘사하고 있어 이미 검찰과 법원의 재심에 의해 밝혀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안기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 대해 북풍을 노리고 조작한 것이라며 신뢰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1997년 대선당시 가장 큰 이슈였던 북풍사건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저지시키기 위해 안기부와 북한이 공조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검찰 수사에 의하여 밝혀진 바가 있다. 또한 '오익제 편지', '김병식 편지', '이대성 파일' 등 선거 때면 언론은 김대중과 관련해 사상 의혹들을 봇물처럼 쏟아내곤 했다. 그 의혹들은 거의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북풍 공작에 뒷돈을 댔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안기부 전 1차장, 대공수사실장 등 안기부 고위 간부가 줄줄이 구속됐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였으며 한국 문제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1980년대 CIA 공작원이었던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 행적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 전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어 안기부 문건의 신빙성에 의문점을 던지고 있다.

    1951년 3월엔 목포해운회사(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상경하여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등.. 여러편의 노동문제글을 기고하며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

    김대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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