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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 (三陟 頭陀山 李承休 遺蹟)-Historic Site Related to Yi Seung-hyu in Dutasan Mountain, Samcheok
    문화재/내가 본 사적 2023. 11. 14. 19:02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생활유적
    면적 34,407㎡
    지정일 2000.09.16
    소재지 강원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 외 (내미로리)
    시대 충렬왕13년(1287)
    소유 삼척시 등 
    관리 삼척시 
    문화재 정보 의견 방
    문화재 담당부서 : 보존정책과 - 상세문의
    설명비교
     
     

    이승휴(李承休, 1224년 ~ 1300년 11월 13일(음력 10월 2일[1]))는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현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사람이며, 가리 이씨(加利 李氏)의 시조이다. 제왕운기》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9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신서(申諝) 밑에서 《춘추좌씨전》과 《주역(周易)》을 익혔다. 14세에 아버지 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 밑에서 양육되었다.

    그 후 몽고 침입으로 고려 정부가 천도(遷都)한 강화도로 들어가서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우 관계를 맺게 된다. 29세가 되는 1252년(고종 39년)에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환도하지 못하고 두타산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려오자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했다. 원나라에서 올린 그의 표문(表文)은 원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다. 동행했던 송송례도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탄복했다.

    귀국 후 벼슬이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다. 하지만 탐관오리 7명의 죄상을 밝혀 가산을 몰수한 일로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안거사(動安居士)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1280년(충렬왕 6년)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된 이승휴는 감찰시사(監察侍史) 심양(沈諹), 잡단(雜端) 진척(陳倜), 시사(侍史) 문응(文應) 등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되었다.

    그 후 한동안 벼슬을 떠나 용안당(容安堂)에서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하였다.

    1300년(충렬왕 26년) 10월 2일(양력 11월 13일)에 77세를 일기로 고단한 생을 마쳤다.

    성질이 정직해 세상 사람과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저서

    이승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https://youtu.be/rFHA81-TSsM

    https://youtu.be/rFHA81-TSsM?t=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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