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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仁民祠
    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23. 11. 6. 13:53

    仁民祠

    영어공식명칭 Inminsa Shrin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개화2길 64-3[가지리 567]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용균
    [상세정보]

    [정의]

    1862년 거창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유생 이승모(李承模)와 이승진(李承震)을 기리는 사당.

    [개설]

    이승모와 이승진은 1862년(철종 13) 거창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유생들이었다. 거창 농민 봉기가 된 후 이승모는 통문을 지은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가 사망하였다. 후에 손자 이우형은 할아버지의 원통함을 밝히고 위로하고자 1932년 사당을 세워 당시 희생되었던 문중의 두 인물인 이승모와 이승진에게 제사하였다.

    [위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개화2길 64-3[가지리 567]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이승모와 이승진은 1862년 거창의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유생들이었다. 당시 거창 부사 황종석과 향리들은 전세와 환곡을 과잉 징수하여 착복하였다. 부사 황종석은 금전 1만 냥, 쌀 100석을 착복했고, 향리 신재문은 곡식 6천여 석, 향리 장복영은 2,500석을 횡령하였다. 이에 거창 농민들은 부사 황종석이 진주 농민 봉기를 진압하러 간 틈을 타 봉기하고, 거창 도호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승모와 이승진은 초기 단계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인민사의 기문에 따르면, 이승모는 자질이 빼어나고, 기개가 강직하며, 언론이 엄하고 곧으며, 큰 뜻을 품고 있어서 지역민들 사이에 인망이 있었다고 한다. 이승모는 거창 부사와 향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몇몇 동지들과 뜻을 모아 거창 부사를 경상 감사와 중앙 정부에 고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에 앞서 중론을 모으고자 지역 인사들에게 통문을 돌려 거창 영천 장날에 맞추어 집회를 소집하였다. 통문은 이승모가 작성하였다. 당시 거사를 함께 도모했던 인물은 인민사에 함께 제향된 이승진 이외에도 후에 농민 봉기를 끝까지 주도했던 이시규, 최남규, 이승문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862년 3월 21일 영천 장날, 장터에서 열렸던 향회에 수많은 농민들이 운집하였다. 이승모는 농민의 뜻을 모아 경상도 감영에 보낼 청원서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집회 참가자들이 점점 과격해져 사태가 봉기로 치달았다. 이승모는 합법적인 청원을 목표로 했으나 집회는 농민들이 관아를 점령하고 향리와 부호의 집을 공격하는 민란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승모는 흥분한 농민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인민사 비문은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이왕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아전과 백성 중에 권세 있고 위엄스러웠던 자들이 온갖 폐단을 낳았으니 먼저 소탕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소리치니 만 명의 입술이 우레처럼 호응했고, 한 구석에서 선동하니 사방에서 바람처럼 따라서, 조짐이 매우 어그러졌다. 이에 그치게 할 수도 없고, 해산시킬 방법도 없어 위태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속수무책이라, 마침내 몸을 빼어 무리를 떠나 길게 탄식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비문을 쓴 이준섭은 스스로 70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마을 노인들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했으므로 그의 기록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모는 거창 농민 봉기 초기 단계를 주도했다가 봉기가 과격해지자 곧 이탈했던 거창의 향반이었다. 그러나 농민 봉기가 수습되자 이승모는 통문을 지은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그 후 손자 이우형은 할아버지의 원통함을 밝히고 위로하고자 1932년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그리고 사당의 현판에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인민사(仁民祠)’라고 새겼다.

    [형태]

    인민사는 정면 1칸, 측면 1칸 반의 사당이다.

    [현황]

    인민사는 벽진 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인민사는 비록 문중에서 세웠지만 거창 농민 봉기 지도자를 제사하는 사당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https://youtu.be/l3-jc4YR5cM

    https://youtu.be/l3-jc4YR5cM?t=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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