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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최회 정려, 열녀 전주 이씨 정려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23. 11. 4. 13:32
직선 거리 300m도 되지 않는 거리에 두 개의 정려가 있다.
효자 최회 정려(孝子 崔澮 旌閭)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효자문이다. 2001년 5월 31일 연기군의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재지정되었다.
개요
효자 최회 정려(孝子 崔澮 旌閭)는 조선시대의 효자 최회(催會, 1563~1621)의 효행(孝行)을 세상에 널리 알려 칭찬하고 기억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명정(銘旌)을 현판(懸板)으로 걸어놓은 정문(旌門)이다. 최회의 본관(本貫)은 강화(江華), 자(字)는 경택(景澤)이다. 집안에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이 번성(繁盛)하기를 기원하면서 ‘연기 봉산동 향나무(천연기념물 제321호)’를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최중룡(崔重龍, 1543~1575)의 아들이다.
최회는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고 남의 잘못을 감쌀 줄 아는 성품으로 주변에 칭찬이 그치지 않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가난한 선비들과 어울리고 청렴하게 지냈다 한다. 그의 나이 1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곁을 지켰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친구들을 멀리하고 공부에 전념하여 1590년(선조 23)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한 증광시(增廣試)에서 생원(生員)이 되었다. 홀로 계신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계시자 직접 대소변을 받고 맛을 보아 병의 차도를 알아보았으며, 병에 좋다는 약을 어렵게 구해드렸지만 낫지 않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한다. 58세의 나이에도 어머니의 쾌유를 바라는 기도를 매일 드리다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최회의 효행에 대해 지역의 유림(儒林)들이 글을 올려 1686년(숙종 12)에 명정을 받고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내부에는 최회의 현판(懸板)이 걸려있고 그 위에 1702년(숙종 28) 증손(曾孫)인 최훤(崔煊)이 최회의 행적에 대해 작성한 기록이 남아있다.
효자 최회 정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열녀 전주이씨 정려(烈女 全州李氏 旌閭)는 세종특별시 봉산리에 있는 정려이다.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의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열녀 전주이씨 정려(烈女 全州李氏 旌閭)는 조선시대 열녀 전주이씨(1759~1779)의 열행(烈行)을 세상에 널리 알려 칭찬하고 기억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명정(銘旌)을 현판(懸板)으로 걸어놓은 정문(旌門)이다.
전주이씨는 1759년(영조 35) 공주(公州)에서 태어났으며, 11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무덤을 보살필 만큼 효심이 뛰어났다고 한다. 1777년(정조 1) 19세에 강화최씨(江華崔氏)인 최지철(1759~1778)과 혼인을 하였으나 남편이 1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만다. 그러자 남편을 따라 죽을 각오로 7일간 식음을 전폐하던 중 뱃속에 자식이 있을지 모른다는 친정아버지의 말에 몸을 추스른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나도 아기를 밴 낌새가 없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전주이씨의 열행에 대해 지역의 유림(儒林)들이 글을 올려 1784년(정조 8)에 명정을 받고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내부에는 전주이씨의 현판이 걸려있으며, 전주이씨의 행적과 정문을 만든 기록이 쓰여 있는 정려비(旌閭碑)가 있다.
열녀 전주이씨 정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전주 이씨 정려는 공주 출신인 이 씨 부인은 19세 때 최지철과 부부가 되었으나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 전주 이씨의 사연을 마을 사람들이 조정에 알려 1784년 정조 임금이 열녀 정려를 명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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