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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열투사김지섭선생문화재/내가 본 기타문화재 2012. 11. 8. 17:28
항일의열투사김지섭선생
안동시 정하동 낙동강변 영호루 옆에 자리잡은 추강 김지섭 선생의 기념비는 한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다간 선생의 고운 뜻을 기리기 위해 유족 및 지역 인사들이 기념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1971년 건립하였다. 5평의 부지에 건립된 기념비는 높이 6.4m에 폭 0.25m로 3층 석조기단과 석조 거북기대로 이루어져 있다.
김지섭(金祉燮1885.고종 22∼1928.2.20)
독립운동가.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추강(秋岡). 경상북도 안동 출신.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일어를 자습해 21세 때에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김원봉(金元鳳)ㆍ곽재기(郭在驥)ㆍ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였다.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ㆍ상해ㆍ시베리아 등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고자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국내에서 파괴공작을 실행하고자 1923년 3월에 폭탄 36개를 상해로부터 톈진(天津)으로 수송해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안동현(安東縣)에 중개소까지 설치하였다. 그 폭탄을 김시현ㆍ유석현(劉錫鉉)ㆍ황옥(黃鈺) 등에게 서울로 가져오게 해 3월 15일을 기해 조선총독부ㆍ경찰서ㆍ동양척식주식회사ㆍ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찰에 사전에 탐지되어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판사였던 백윤화(白允和)에게 5만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배신당하고 동지 윤병구(尹炳球)마저 붙잡히고 말았다.
이 무렵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가 일어나 한국인 학살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1924년 초 일본 동경에서 소위 제국의회(帝國議會)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를 보복의 기회로 결심하고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이듬 해 1월 4일 동경으로 가던 중, 대판(大阪)에서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황성(皇城)에 투탄하기로 결정하고 1월 5일 황성 정문에 접근하였다. 호위경관이 저지하자 폭탄 한 개를 던지고 재빨리 궁성 쪽으로 달려갔다. 호위경관들이 달려오므로 나머지 폭탄은 니주바시(二重橋) 한복판에 던지고 붙잡혔다.
1925년 8월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어 있던 중, 1927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 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53157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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