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재 某里齋 유형문화재 제307호 모리재는 병자호란(1637)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정온(鄭蘊, 1569~1641)이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숨어서 살던 곳에 세운 서원 형태의 재실*이다. ‘모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어딘지 모른다는 뜻이다. 정온은 모리재를 엉성하고 볼품없는 집이란 뜻으로 ‘구소(鳩巢)’라고 하였다. 또한 이곳은 고사리를 캐어 먹고 굶어 죽었다는 고사를 생각하여 ‘채미헌(採薇軒)’이라고도 불렀다. 정온이 죽자 인조 23년(1645)에 이 자리에 영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냈으나 숙종 30년(1704)에 불타 없어졌고, 숙종 33년(1707)에 모리재를 지었다. 1758년에는 유허비를, 1806년에는 화엽루를 세웠다. 현재 건물은 1921년에 대대적으로 손보고 고쳤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전국 유림의 탐방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문화재 설명
모리재는 1637년 인조(仁祖)가 중국 청 태종 앞에 나가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척화파인 정온(鄭蘊)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전의(典醫)와 광주목사의 손에 구명된 후 낙향하여 죽을 때가지 은거했던 곳을 기념하여 유림들이 건립한 재사(齎舍)로 사당 · 모리재 · 서무 · 화엽루 · 내삼문 · 협문 등과 유허비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으로 사용된 화엽루(花葉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자연석을 둥글게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또 화려한 팔작지붕의 처마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방 처마 끝에는 받침기둥을 세워 지붕을 떠받쳤다. 본당인 모리재는 자연석 초석 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一)자로 된 팔작지붕의 건물로,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선생의 학문을 추모하며 공부하였던 곳이다.
모리재는 재실(齋室)로서 특이하게 남부 지방의 민가 형식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매우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1년에 중수한 것이다.